[작가칼럼] 찔레꽃 향기가 그리운 봄날- 김정희(수필가)
봄기운이 완연하다. 봄이면 푸르름을 단풍으로 단장시켜 떠나보냈던 공연장 주변의 나목들도 불그레한 신열 속에서 움을 틔운다. 더불어 이맘때면 신춘음악회 준비를 위한 리허설로 공연장은 북적이곤 했다. 다양한 레퍼토리를 준비한 출연진들이 관객을 맞이할 설렘으로 들뜨던 시즌이지만 너무도 조용하다. 거제문화예술회관이라고 다를 바 없다.
코로나로 침묵...2021-02-25 20:34:24
[작가칼럼] 지금, 옛날 영화를 보는 중입니다- 이서린(시인)
짙푸른 대나무 숲이 춤을 춘다. 바람에 일렁이는 가느다란 대나무 줄기를 마치 학처럼 유유하게 타는 남자와 여자. 청명검을 쥔 젊은 여자의 얼굴이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과 대나무 잎 사이로 서늘하도록 아름답다. 검 한 자루 없이 맨손으로 여자를 상대하는 중후한 남자의 얼굴도 출렁이는 대나무 사이사이 결연한 표정이다. 춤을 추듯 펼쳐지는 남녀의 대결은 ...2021-02-18 20:44:02
[작가칼럼] 2021 辛丑年 소 이야기- 양미경(수필가)
소만큼 한국인과 친숙한 동물도 없을 것이다. 요즘은 반려견에게 그 자리를 내준 감도 있지만 역사적으로 소는 한국인에겐 가족과도 다름없는 동물이다. 그래서 종종 소의 우직함과 강인함을 민족의 기질에 비유하기도 한다. 기계화 전의 농경사회에서 소는 전답 경작에 절대적인 노동력의 제공처였다. 논밭을 갈고 무거운 짐을 도맡아 나르면서도 새경을 받는 것...2021-02-04 20:09:25
[작가칼럼] 시간은 어떻게 이야기가 되는가- 김향지(소설가)
그 많던 시간은 어디로 갔는가? 문득 생각해보니 내가 살아냈던 시간의 행방이 묘연하다. 내게 주어졌던 시간은 존재하기나 했을까? 흘러간 시간은 어디에 집적되어 있는가?
“시간은 도대체 무엇일까?”
누구나 한번쯤 이런 질문에 사로잡힌 적이 있을 것이다. 과거에도 이런 겹치는 질문을 한 이가 있었으니, 교부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Hipponensis,...2021-01-28 20:17:36
[작가칼럼] 어머니의 사진기- 김정희(수필가)
새해를 맞이하여 서재를 정리하다 보니 오래된 앨범이 눈에 들어온다. 가끔 지나간 추억이 그리울 때면 버릇처럼 앨범을 넘기는 습관이 있던 터였다. 앨범 속에는 시간이 멈춘 채 갈무리된 추억들이 파노라마로 숨을 쉬고 있다. 그중 유독 눈에 띄는 가족사진을 보면서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로 되돌아가본다.
그러니까 몇 년 전 명절이었다. 오랜 외국 생활 후...2021-01-21 19:53:29
[작가칼럼] 설국, 한계령 그리고 겨울나무- 이서린(시인)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1968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일본의 소설가 가와바다 야스나리(1899~1972)의 소설 ‘설국’의 첫 문장이다. 눈 내리는 풍경이 드문 남쪽 도시에 살았던, 열여덟 살의 내가 만났던 일본 소설과의 첫 만남이었다. ‘설국’이라니. 눈의 더미로 쌓인 풍경이라니. 그 설렘과 ‘설국’이라는 장소에 대한 동경이 새삼 생각나는 ...2021-01-14 20:14:12
[작가칼럼] 3월의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양미경(수필가)
내키지는 않지만 신축년(辛丑年) 벽두부터 또다시 코로나19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2020년의 크리스마스는 내 기억에 역대 최악이었던 것 같다. 크리스마스가 예전 같지 않은 건 오래되었다. 거리나 상가에 크리스마스트리와 캐럴이 조금씩 사라지면서 보기 어려워졌고, 풍성하고 흥겨웠던 거리의 풍경도 아기자기하던 가정집의 크리스마스트리도 사라져갔다. 그...2021-01-07 20:14:12
[작가칼럼] 마지막 한 장- 송신근(수필가)
마지막 남은 한 장 달력을 바라본다. 남은 한 장도 작은 바람결에 펄렁이는 세월인데 한 해를 채운 가슴은 내놓을 게 없다. 세월의 끝은 언제나 스산하다. 그래도 젊은 날의 십이월 끝자락은 내일이라는 벅찬 꿈이었고 뜨겁던 열정은 늘 미로와 같은 기대를 장식했었다. 허허로운 겨울밤, 적막 속에서 바라보는 밤 풍경은 커다란 완전성에서 더 작은 완전성으로 축...2020-12-17 20:06:22
[작가칼럼] 습관적 희망사항, 새해- 김미숙(시인)
2021년 신축년(辛丑年) 하얀 소의 해가 지평선 너머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2020년 경자년, 흰쥐의 신성함으로 일이 술술 풀리기를 희망하면서 시작했던 한 해가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또한 ‘흰 소는 신성함을 뜻하면서 인내와 부지런함, 순수함, 성실한 영향을 가지고 있고, 길한 기운도 가지고 있다’ 고 한다’, ‘천천히 걸어도 황소걸음’이라는 속담처럼 근면과...2020-12-10 20:40:38
[작가칼럼] 너의 이름은- 이재성(시인)
저성장, 저소비, 높은 실업률, 고위험. 시대 변화에 따라 새롭게 부상하는 표준이 있다. 과거에 대해 반성하고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는 시점이다. 4차 산업혁명과 더불어 코로나19가 뒤섞인다. 사라지는 직업군이 순위표를 작성하는 동안 코로나 이후 세계에 대한 모색이 활발하다. 미래학자들은 입 모아 도래해야 되는 세상이 더 빨리 왔을 뿐이라 말한다. 기술 ...2020-12-03 20:04:30
[작가칼럼] 오순도순 작은 행복 - 황영숙 (시조시인)
노모의 꼬부라진 손톱이 다 닳았다/우거진 야생의 덤불 다 걷어내기까지/밥 벌러 집나간 아들 신불자는 면했는지/미더운 영감가고 철망도 없는 밭을/시뻘건 비료포대가 외다리로 지키는데/후다닥, 스치는 새끼 오소리 눈망울이 아리다/오금 못 편 고용살이 제발 데려가라고/하늘에 대고 냅다 상앗대를 내지르자/와르르 쏟아진 별들 가막사리 씨가 됐다’ -(시 ‘12월...2020-11-26 21:00:53
[작가칼럼] 유리병 속의 죽음- 송신근(수필가)
찬바람에 하늘도 파랗게 얼어붙는 겨울이 되면 나는 바다를 찾는다. 검은 물결이 수면 위에 찰랑거리는 겨울 바다의 심연, 그 깊은 침묵에 다가서지 못한다면 내 삶의 무게가 한없이 가벼워질 것만 같기 때문이다. 섬에서 태어나고 보낸 나의 유년기는 하나의 작은 그릇과도 같은 공간이었다. 그 속에는 보석처럼 빛나는 기억들이 몽돌처럼 담겨 있다.
그때부터 바...2020-11-19 20:36:34
[작가칼럼] 허수아비의 시간- 김미숙(시인)
어느 날 단풍잎 노란 시골길을 가다가 눈에 띄는 풍경이 예사롭지 않아 잠시 차를 세웠다. 한때 풍성하던 논은 이미 가을걷이가 끝났고, 들판 곳곳 짚단을 싼 비닐포장들이 마시멜로처럼 둥글게 말려 있다. 그 사이에 홀로 서 있는 저 허수아비 하나. 요즘은 참새 쫓을 일도 없고 추수가 끝난 마른 논인데 허수아비가 필요할 리는 없다. 누군가 재미삼아 만들어 세...2020-11-12 20:22:09
[작가칼럼] 오늘 하루도 안녕하십니까- 이재성(시인)
만추가 되기까진 아직 시간이 남았다. 철의 변화가 하루하루 쌓인다. 은행나무가 노랗게 옷을 갈아입는다. 거리마다 조금씩 울긋불긋한 낙엽이 덮인다. 순식간 떨어지는 기온 앞에 사람들도 옷을 갈아입는다. 점점 짧아지는 봄과 가을이 사라지진 않을까 생각했던 것도 잠시, 낮아진 코로나19 단계에 가을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지역마다 대표 가을축제가 저마다 코...2020-11-05 20:24:56
[작가칼럼] 화석처럼 엎드려- 황영숙(시조시인)
‘거름포대 걷어내자 도드라지는 동면/기우뚱 쏠리어도 꼼짝 않는 옴두꺼비/웅크린 축생의 잔등 덤불로 덮어주었다’ -(시 ‘화석처럼’ 일부)
세월은 잡아도 잡히지 않지만 그 사이에 우주 만물은 끝임 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며 영원을 이어가고 있다. 시월도 하순, 꽃샘추위를 견뎠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겨울 채비를 할 때가 되었다. 추수를 끝내고, 김장...2020-10-29 20:04: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