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간이역] 겨울 들판을 건너온 바람이- 신달자
눈 덮인 겨울 들판을 건너온 바람이
내 집 노크를 했다
내가 문 열지도 않았는데 문은 저절로 열렸고
바람은 아주 여유 있게 익숙하게 거실로 들어왔다
어떻게 내 집에 왔냐고 물었더니
여기 겨울 들판 아닌가요? 겨울 들판만 나는 바람이라고 한다
이왕 오셨으니
따뜻한 차 한 잔 바람 앞에 놓았더니
겨울 들판은 겨울 들판만 마신다...2021-01-14 08:00:38
[시가 있는 간이역] 부부- 제민숙
우리 집 기울기는 각도가 늘 다르다
어떤 날은 좁혀졌다 어떤 날은 벌어졌다
예각과
둔각 사이를
질정 없이 넘나든다
오래된 나사처럼 녹이 슬면 닦아주고
헐겁고 무뎌지면 조였다가 풀었다가
때로는 걸음 멈추고
바라보는
그런 사이…
☞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아름다운 이름은 ‘부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세상에서 가...2021-01-07 07:59:47
[시가 있는 간이역] 연잎경(經)- 김형엽
바람이 왔다고
함께 흔들리지 않더라
먼저 흔들리겠다 다투지도 않더라
먼저 흔들린 잎이
온몸으로 제 바닥을 닿고 올 때까지
나중 흔들릴 잎이
깊은 그늘이 되어주고 있더라
비스듬히 기울어
의자도 되고 그릇도 되어주는 잎들이
오래 휘청거려온 사람들의 걸음을
한 번쯤은 안온한 수평으로 서게 하더라
☞ 비오는 날 연잎을 눈여겨보면 구슬 같은...2020-12-24 08:14:29
[시가 있는 간이역] 대나무 꼭대기에 앉은 새- 유홍준
대나무 꼭대기에 앉은 새가 먼 데를 바라보고 있다
대나무 우듬지가 요렇게 살짝 휘어져 있다
저렇게 조그만 것이 앉아도 휘어지는 것이 있다
저렇게 휘어져도 부러지지 않는 것이 있다
새는 보름달 속에 들어가 있다
머리가 둥글고, 부리가 쫑긋하고, 날개를 다 접은 세다 몸집이 작고 검은 새다
너의 이름을 모른다는 건 축복
창문 ...2020-12-17 08:02:02- [시가 있는 간이역] 청동검의 노래 - 임채성
얼마나 걸었을까, 무릎 뼈가 시큰하다
얼어붙은 산과 계곡 자갈뿐인 들을 지나
신탁神託을 따라나선 길 흙먼지가 자욱하다
선지자 거울에 ...2020-12-10 08:09:29
[시가 있는 간이역] ‘금기 사항-시험 보기 전’ - 주미경
계란말이는 동생에게 양보해
외운 게 돌돌 말려 버리니까
양파링과 도넛도 먹지 마
뻥 기억력에 구멍이 나
축구화도 신지 마
뻥 정답을 차고 말 거야
선풍기는 틀지 마
아는 문제만 훅 날아가
알 것 같은 문제도 훅 날아가
망고 슬러시를 먹을까 말까
망설이다가는 시험을
망쳐 제대로
망쳐
아니 아니 학교에 가지 마
교장 선생님께 인사하다가
핵심정리
총...2020-12-03 08:05:02
[시가 있는 간이역] 쓸데없는 짓을 하다 - 윤덕
홍매화 허리 자를 기계톱을 들고 꽃잎 지는 걸 아쉬워하고
나무 심을 구덩일 파다 꼬물거리는 굼벵일 보고는 왜 어둠을
파먹고 살았는지
물어보기도 하고
고로쇠나무를 심다 가지에 흐르는 수액은 몇 바퀴 돌다
내 몸으로 들어올 것인지
헤아려 보기도 하고
겨울에 피는 개나리꽃을 보고는 세상이 미쳤다고 지축을
흔들어 깨우기...2020-11-26 08:04:49
[시가 있는 간이역] 만두 쟁반 - 허연
이상하게 난 만두 앞에서 약하다. 일찍 떠나보낸 어머니도, 위태로웠지만 따뜻했던 어린 시절도, 제 살길 찾아 흩어지기 전 형제들의 모습도, 줄지어 쟁반 위에 놓여 있던 만두로 남아 있다.
어쩌면 인생은 만두다. 파릇한 청춘과 짜내도 계속 나오는 땀이나 눈물, 지친 살과 뼈, 거기에 기억까지 넣고 버무리는 만두는 인생을 닮았다.
하얀 만두피 속에 태생이 다른 것들을...2020-11-19 08:02:03
[시가 있는 간이역] ‘십만단풍설-율곡 이이’ - 오영민
가을이 오기도 전 예비 된 십만 단풍
화석정 앞에 두고 노을 먼저 짙었는데
어쩐지 늦여름 밤은 모를 것만 같았다
껍질마다 서리처럼 사과즙이 내리던 날
속수무책 불 싸지른 가을 앞에 무너지는
늦여름 신음 소리가 말굽인 양 다급했다
고삐 놓아 도망하는 그들의 행렬 뒤로
산과 들이 북을 때려 등 밝히는 눈빛들
일십만 정예 단풍의 빼든 칼이 삼엄하다
...2020-11-12 08:04:11
[시가 있는 간이역] 낙엽 - 김미희
나뭇잎은 새들에게
나는 법을 배웠다
누렇게 벌겋게
온 힘을 다해 흔들리며
나는 연습을 했다
가을이 깊어갈 무렵
나뭇잎은 드디어
날 수 있게 되었다
높이 더 높이 날기 위한
날갯짓이 아니었다
낮게 낮게 날아
땅 위로 사뿐
내려앉기 위한 날갯짓이었다.
☞ 나무에서 떨어져 짧은 비행을 하고 내려앉는 나뭇잎을 보는 일은...2020-11-05 07:59:30- [시가 있는 간이역] 복권 추첨일- 박장재일주일이 행복했네
사바나 기후로 바뀌어 가는 온대 지방 남쪽에서
돈과 행복이 수평선을 그린다
평행선을 그린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더니
봄은 지나가고
온갖 풀들이 웃음 짓는 여름까지 지나면
목이 마르다
가을이 지난다
불태운 가지만 남는다
☞지구촌 사람 누구나가 언젠가는 한번쯤 ‘내게도 행운...2020-10-29 08:03:48
[시가 있는 간이역] 가을날- 김사인
좋지 가을볕은
뽀뿌링 호청같이 깔깔하지
가을볕은 차
젊은 나이에 혼자된 재종숙모 같지
허전하고 한가하지
빈 들 너머
버스는 달려가고 물방개처럼
추수 끝난 나락 대궁을 나는 뽁뽁 눌러 밟았네
피는 먼지구름 위로
하늘빛은
고요
돌이킬 수 없었네
아무도 오지 않던 가을날
☞“좋지” 이 시의 시작이 좋지 않습니까? 그래요! 가을날, 가을볕에...2020-10-22 08:02:52
[시가 있는 간이역] 소 산 - 서성자
슬프기도 바쁠 텐데 청수국 화창하여라
저 혼자 풍성한 축제를 치르는 듯
무수한 작별을 씻는 하늘 소풍 뒤뜰에
냄새 닮은 사람들 한소끔 울고 난 뒤
숨탄것의 냉정을 허락한 어느 신이
요절이 꿈이라 적힌
옛 편지를 태운다
☞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지는데 세상은 모두 맑음이라니…. 무수한 별이 반짝반짝 빛나는 그런 밤이 밝음이니…. 지독한...2020-10-15 07:59:45
[시가 있는 간이역] 두부찌개- 이창규
혼자서 할 수 없는 일
둘이면 좋다.
둘이서 모자라면
셋이서는 더 좋다.
된장 혼자는
된장맛 뿐이고
꽃게랑 조개 함께하면
셋이서 해물찌개
두부까지 더하면
이름이 바뀐다.
☞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처럼 여럿이 힘을 합하면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다. 음식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좋은 재료가 있다고 하...2020-10-08 08:13:44
[시가 있는 간이역] 받아둔 물 - 주선화
밥물은
전날 받아둔 물로 한다
미리 받아둔
순한 물이다
화를 가라앉힌 물이다
찻물이나
화분에 물을 주어도
순한 물을 쓴다
순해지는 나이를 지나고 보니
두둑한 땅 아래로만 흐르는
이랑 물인 거 같고
나는 여전히 악, 소리 한번 하지 못하고
넌지시 바보 소리나 듣는
그저 그렇게 받아둔 물인 거 같고
☞ ...2020-09-24 08:07: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