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바마마-옹알이 시간 - 박서영첫 마디 울음.그것은 가슴에 고여 왜 사라지지 않나.똥으로도, 오줌으로도 흘러나오지 않나.맨 처음의 발음이었던 울음.나의 언어와 표현은 발달하고상처와 고통은 안으로 깊이 가라앉고가끔은 비명도 질렀는데왜 아직도 옹알이를 벗어나지 못하는 건가.입 안에서 빙글빙글 천둥을 녹여먹고, 연애를 녹여먹고 있나.잠자...2013-09-26 11:00:00
- [시가있는 간이역] 꾀꼬리 달- 이은봉그래요 달은 깃털 샛노란 꾀꼬리지요부리조차 샛노랗지요 달은어두운 밤하늘 환하게 쪼아대다가그만 지쳤나 봐요우리 집 베란다에까지 날아와플라스틱 창들을 쪼아대고 있네요샛노란 깃털을 뽑아주방 안에 자리를 펴는 것을 보면달은 배가 고픈가 봐요으음, 꾀꼴대는 소리가꼬록대는 소리로 들리네요베란다에서 저절로 ...2013-09-12 11:00:00
- 맹인- 이우걸맹인은 사물을 손으로 읽는다손은 그가 지닌 세계의 창이다마음이 길을 잃으면쓸쓸한 오독(誤讀)도 있는…눈 뜬 우리는또 얼마나 맹인인가보고도 만지고도 읽지 못한 세상을빈 하늘 뜬구름인양하염없이 바라본다.- 시선집 <어쩌면 이것들은> 중에서☞ 손으로 세상을 읽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지팡이를 거쳐서 손...2013-09-05 11:00:00
- 안부- 최승자 안부- 최승자나더러, 안녕하냐고요?그러엄, 안녕하죠.내 하루의 밥상은언젠가 당신이 했던 말 한마디로 진수성찬이 되고요,내 한 해의 의상은당신이 보내주는 한 번의 미소로 충분하고요,전 지금 부엌에서 당근을 씻고 있거든요.세계의 모든 당근들에 대해시를 쓸까 말까 생각하는 중이에요.우연이 가장 훌륭한 선택이 ...2013-08-29 11:00:00
- 처서- 성선경나도 이제한창때는 지났나 봅니다.내 영혼 어디선가설렁설렁 바람이 불고내 무릎 아래에서알기는 칠월의 귀뚜라미라고말끝마다 사랑 사랑 합니다.나는 이제 막 고개 위를 올라섰는데속으로 굽어져 이제 찬바람이 이네요.누가 이런 변화를 알고 이름 지었을까요.불혹(不惑),나는 그쯤에서 흔들리기 시작했으니까요.- 시...2013-08-22 11:00:00
- 카레- 고영조밥 대신카레를 끓인다아내가 없는 동안양파와 감자당근과 마늘의뿔난 몸을 섞는다섞여서제 모습을 아주 버릴 때까지채찍으로 후려치거나섞이지 않는 몸들은더 작게토막 토막 자른다당근의 맛도 양파의 맛도죽인다쓰도 달도 않은저 묵묵부답다만 점액질의 순종얼굴 없는 혼돈의 맛을 끓인다- 시집 <감자를 굽고 싶다&...2013-08-08 11:00:00
- 생가1- 복효근 생가1옛날에 임신한 노루를 잡아먹은 두 친구가같은 무렵 각각 아들을 낳았는데두 아이 모두 벙어리가 되더란다별 아래 어머니가 들려주신 이야기환갑을 넘긴 그 아이들 아직도 한 동네 살고 있어축생과 인간세를 잇는전생과 후생을 잇는보이진 않지만 있기는 있는질기고 질긴 연기의 끈이 만져지는 이야기교룡산과 풍...2013-08-01 11:00:00
달과 매화- 송찬호 달 뜨는 초저녁활짝 핀 매화 아래 서니매화에 달을 그린그림쟁이의 마음을 조금 알겠네매화는 달이 얼마나 맑고 차운지가까이 불러 한번 어루만져보고 싶었을 테고달은 또 매화 곁으로 조금씩 옮겨 앉다가그 향기를지팡이 삼아꽃 한 가쟁이를 꺾어 가고 싶었을 테...2013-07-25 11:00:00- 천원한장- 이한걸 천 원 한 장 키 낮은 처마 맞대고 이어진 동네 골목길을 형제가 걸어가고 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목에 걸린 열쇠 달랑달랑 흔들린다 학원에도 못 가고 물놀이도 못 가...2013-07-18 01:00:00
- 뒷굽- 허형만구두 뒷굽이 닳아 그믐달처럼 한쪽으로 기울어졌다수선집 주인이 뒷굽을 뜯어내며참 오래도 신으셨네요 하는 말이참 오래도 사시네요 하는 말로 들렸다가참 오래도 기울어지셨네요 하는 말로 바뀌어 들렸다수선집 주인이 좌빨이네요 할까봐 겁났고우빨이네요 할까봐 더 겁났다구두 뒷굽을 새로 갈 때마다 나는돌고 도는...2013-07-11 01:00:00
- 혜자의 눈꽃*- 이월춘훌쩍 서른 해 저쪽말복과 입추 어름이었지 아마칠불사 계곡 대궐터 민박집 툇마루에 앉아세한(歲寒)의 마당을 거닐며 추사를 만나고 있었지드럼통 난로가 사람 온기 붉은 서정으로한촌의 적막과 그리움의 책갈피를 넘길 때노란 꽃술의 발자국 눈꽃이 피어났어혜자보다 혜자 엄마의 사연은 인지상정일까부뚜막에 앉아 부...2013-07-04 01:00:00
- 드문드문, 당신- 정유미대여기간 일주일, 시집을 빌린다몽글몽글 침이 고여오는 것이씹을수록 달라붙어연애시절 그는시집 속 빗물 같아서한 구절 한 단락이 뻐근하게 저려와아프게 묻곤 뜨겁게 끄덕였지그의 우산이 되려 헤어지지 않을, 주문을 했어손 안에 든머리맡에 놓인훔치거나 엿보지 않아도드문드문 읽히는 당신.- <경남문학> 201...2013-06-27 01:00:00
- 파열- 김명은들끓던 벨소리불과 몇 초 만에 차가워진다이어폰을 꽂은 남자의 구두코가 계단에서 꺾인다전화기를 귀에 대면 조련사의 갈고리에 찢기는 코끼리소리 들린다코끼리소리보다 컸던 여자의 귀가 바늘귀보다 작아진다목마른 코끼리가 긴 코로 침 뱉는 소리 들리고목덜미로 번져가던 이른 햇살이파랗게 얼어붙는다 그는 간곡...2013-06-20 01:00:00
- 살구나무와 젖소- 유희선축사 담장에살구나무 세 그루소젖 한 번 빨아보지 못하고살구는 익어가네일 년 내내 김 오르는 똥오줌 냄새로살구는 통통해지네녹슨 자물쇠 너머명례공소 종소리낙동강 물을 퍼 올려살구를 씻어주네젖소들이눈을 끔뻑일 때마다살구 떨어지는 소리침 흘리는비탈진 축사로굴러가는살빛 살구들 -<시인의 눈> 2012년. ...2013-06-13 01:00:00
- 흐린날의 명상- 황영숙 시인흐린 날의 명상오래 기다렸다는 듯이검은 장갑을 낀 우수가베란다의 창밖에기대어 있다아무래도 나는 오늘저 정체 모를 구름 속으로걸어가게 될 것 같다깊게 일렁이는 슬픔들이그윽한 풍경 속으로 젖어들고감출 수 없는 마음의 끝 하나잡지 못해온종일 목이 아프다짙은 수묵화처럼내려앉은 산기슭에구름은 느리게 지나...2013-05-30 01: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