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등차(無等茶) - 김현승
가을은술보다차 끓이기 좋은 시절…갈가마귀 울음에 산들 여위어 가고,씀바귀 마른 잎에바람이 지나는,남쪽 십일월의 긴 긴 밤을,차 끓이며끓이며외로움도 향기인 양 마음에 젖는다.☞ 술! 술 곁에는 늘 느낌표가 붙어 있었다. 외할아버지 탁주 심부름하다 주전자 입에 대고 홀짝거리던 술과, 대학시절 이후로 지독한...2016-09-22 07:00:00
- 비정규직 초승달 - 정연홍
뱃가죽처럼 홀쭉하다낫을 품고 있구나만월이 되어 웃을 때까지얼마나 오래외로운 저 철탑에 걸려 있어야 하나☞ 조선업 경기가 엉망이다. 연일 구조조정 타령에 마음이 무거운데, 수백억원대 횡령 비리가 터져 나오니 화병이 날 지경이다.퇴근길, 회사버스에서 우르르 쏟아지는 작업복들. 내리자마자 담뱃불부터 찾...2016-09-08 07:00:00
- 네 모발 - 김춘수
여름은 가고네 모발을 생각한다.가을이 와서 낙엽이 지면네 모발은 바다를 건너더욱 깊이 내 잠 속으로 오리라.바람이 이제어제의 제 그늘을 떠나고 있다.분꽃 하나가 바람을 따라 흐르고 있다.하늘 높이 눈을 뜨고 불리우며흐르고 있다.마침내 깊이깊이이 세상의 분꽃 하나가하늘에 묻히리라.☞ 지긋지긋하던 폭염 ...2016-09-01 07:00:00
- 외계인 - 이달균
외계인이 왔다.갑자기 지구인은 어마두지하다.“긴장하지 마라. 우리는 수억 광년 떨어진 별에서 왔다. 우리의 관심은 그대들이 아니라 지구를 푸르게 비옥하게 애쓰는 지렁이, 쇠똥구리 등속이다. 이미 그들과 우린 오랫동안 교신해 왔다.”☞ 외계(外界)란 단어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하고 싶다. 수억 광년 떨어진 시...2016-08-25 07:00:00
- 시인의 마음 - 고은
시인은 절도 살인 사기 폭력그런 것들의 범죄 틈에 끼어서이 세계의 한 모퉁이에서 태어났다시인의 말은 청계천 창신동 종삼 산동네그런 곳의 욕지거리 쌍말의 틈에 끼어서이 사회의 한 동안을 맡는다시인의 마음은 모든 악과 허위의 틈으로 스며나온이 시대의 진실 외마디를 만든다그리고 그 마음은다른 마음에 맞...2016-08-18 07:00:00
- 밥물 - 성선경
늘 밥을 먹으면서나도 세상의 인정 같은 김이 술술 나는따뜻한 밥 한 그릇 되었으면 했으나온전히 따뜻한 한 그릇 밥이 되려면눈물같이 흑 흑 솥전을 적시며한 번은 크게 울어 밥물이 넘쳐야 한다는가슴 끓는 사실을 알고서는아 아 나는 언제 저렇게 울어보았느냐밥 한 술 뜰 때마다 생쌀이 씹힙니다. 마음의 불이 ...2016-08-11 07:00:00
-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 김영랑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새악시 볼에 떠 오는 부끄럼같이시의 가슴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 새악시 볼에 떠 오는 부끄...2016-08-04 07:00:00
- 우리 말고 또 누가 이 밥그릇에 누웠을까?- 김선우이 집 한 채는쥐들의 밥그릇바퀴벌레들의 밥그릇이 방을 관 삼아 누운오래 전 죽은 자의 밥그릇추억의, 욕창을 앓는 세월의 밥그릇맵고 짠 눈물 찐득찐득 흘려대던병든 복숭아나무의 밥그릇멍든 구름의 밥그릇상처들의,이 집 한 그릇밥그릇 텅텅 비면 배고플까봐그대와 나 밥그릇 속에 눕네그대에게서 아아 세상에서 제...2016-07-28 07:00:00
- 눈 오는 길 - 신대철
막 헤어진 이가야트막한 언덕집처마 밑으로 들어온다.할말을 빠뜨렸다는 듯씩 웃으면서 말한다.눈이 오네요그 한마디 품어 안고유년 시절을 넘어숨차게 올라온 그의 눈빛에눈 오는 길 어른거린다.그 사이 눈 그치고더 할 말이 없어도눈발이 흔들린다.☞ 교복 입고 내려오는 중·고등학교 하굣길을 스쳐갈 때마다, 남...2016-07-21 07:00:00
- 울타리 밖 - 박용래
머리가 마늘쪽같이 생긴 고향의 소녀와한여름을 알몸으로 사는 고향의 소년과같이 낯이 설어도 사랑스러운 들길이 있다.그 길에 아지랑이가 피듯 태양이 타듯제비가 날 듯 길들 따라 물이 흐르듯 그렇게그렇게천연天然히울타리 밖에도 화초를 심는 마을이 있다오래오래 잔광殘光이 눈부신 마을이 있다밤이면 더 많이...2016-07-14 07:00:00
- 라산스카 - 김종삼
바로크시대 음악 들을 때마다팔레스트리나 들을 때마다그 시대 풍경 다가올 때마다하늘나라 다가올 때마다맑은 물가 다가올 때마다라산스카나 지은 죄 많아죽어서도영혼이 없으리☞ 라산스카는 뉴욕 출신의 소프라노 가수, 헐더 라샨스카이다. 김종삼 시인이 편애한 가수인 모양이다. 그의 시집에서 이 여자의 이름이...2016-07-07 07:00:00
- 벨로우니카에게 - 이용악
고향선 월계랑 붉게두 피나보다내사 아무렇게 불러도 즐거운 이름어디서 멎는 것일까달리는 뿔사슴과 말발굽 소리와밤중에 부불을 치어든 새의 무리와슬라브의 딸아 벨로우니카우리 잠깐 자랑과 부끄러움을 잊어버리고달빛 따라 가벼운 구름처럼 일곱 개의 바다를 건너가리고향선 월계랑 붉게두 피나보다내사 아무...2016-06-30 07:00:00
- 성자聖子 - 오삼록
새댁은 지하도의 오후를 내려가다짐을 든 할머니를 도와다시 오른다할머니는 지팡이에 기대어오른 다리로 계단을 오른다짐을 든 손은 엉금엉금 벽을 오르는 담쟁이 같다할머니도 빛났던 한때가있었을 터,빛고운 추억은 조글조글하다시간은 저만치 우두커니서 있는데마주 오르는 둘은 모녀처럼다정하다새댁은 슬슬 계...2016-06-23 07:00:00
- 추억- 정소란
얼마나 많이 흔들리며비 맞고 올지빗줄기도 미끄러진 길을갈매기 낮게 나는 일에도가슴에 물결이 일고너 오는 동안에는몽혼의 잠에 취해 버리기를문 밖에 바람이 불고눈 밑 서늘히 그늘이 지면네가 내 안에 이미 들어 숨을 쉰다고거들어 들어온 미열의 통증이익숙한 처방을 한다일탈이 필요하다☞‘처녀지’를 사전과...2016-06-16 07:00:00
- 백석 시집에 관한 추억 - 서정춘
아버지는 새봄맞이 남새밭에 똥 찌끌고 있고어머니는 언덕배기 구덩이에 호박씨 놓고 있고땋머리 정순이는 떽키칼 떽키칼로 나물 캐고 있고할머니는 복구를 불러서 손자 놈 똥이나 핥아 먹이고나는 나는몽당손이 몽당손이 이 강산 낙화유수 아재비를 따라백석 시집 얻어 보러 고개를 넘고☞ 마치 시인 백석이 직접 ...2016-06-09 07: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