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자인생 - 윤재환
우리가
경제적으로 계산을 할 때
이익이 나면 검은색으로 쓰고
손해가 나면 빨간색으로 쓴다
그래서
흑자 또 적자라 부른다
나는
일기나 편지나
시를 적을 때도
검은색 펜으로 쓴다
나의 삶의 이야기는
온통 검은색으로 쓴 기...2018-09-06 07:00:00
닭, 극채색 볏 - 송재학
볏을 육체로 보지 마라
좁아터진 뇌수에 담지 못할 정신이 극채색과 맞물려
톱니바퀴 모양으로 바깥에 맺힌 것
계관이란 떨림에 매달은 錘이다
빠져나가고 싶지 않은 감옥이다
극지에서 억지로 끄집어내는 낙타의 혹처럼, 숨표처럼
볏이 더 붉...2018-08-30 07:00:00- 별사탕 - 박우담
솜사탕 장수의 모자에는 은하수가 박혀있지.
설탕 막대기로 휘저어
시간의 구름을 만들 수 있지.
우리는 구름 먹는 아이들.
오른손에 창을 쥔 반인반마의 괴물들이지.
끝없이 활활 타오르는 불 속에서
말의 귀와 발굽을 가진 시간의 자식들을
얼마든지 낳을 수 있...2018-08-23 07:00:00
먹은 죄 - 반칠환 쌔끼들에게 줄 풀벌레 잡아오던지빠귀를 새매가 나꾸어 갔다가까스로 허물 벗고 날개 말리던잠자리를 물총새가 꿀꺽 삼켜 버렸다오전에 돋은 새싹을 다람쥐가 갉아먹는다그러나 어느 유족도 복수를 꿈꾸지 않는다다 먹은 죄가 있기 때문이다한없이 슬퍼도 적막한, ...2018-08-16 07:00:00- 오토바이와 개 - 김기택
오토바이에 달린 개줄에 끌리어
개 한 마리
오토바이 따라 달려간다.
두 바퀴와 네 다리가 조금이라도 엇갈리면
개줄은 가차없이 팽팽해지고
그때마다 개다리는 바퀴처럼 땅에 붙어서 간다.
속도가 늘어나도 바퀴는 언제나 한 가지
둥근 모양인데
개다리는 네 개에서 여덟, 열여섯……
활짝 펼쳐지는 ...2018-08-09 07:00:00
사철나무그늘 아래 쉴 때는 - 장정일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굵직한 나...2018-07-26 07:00:00- [시가 있는 간이역] 점심, 후회스러운 - 정일근
한여름 폭염. 무더운 거리 나서기 싫어, 냉방이 잘 된 서늘한 사무실에서 시켜 먹는 편안한 점심. 오래 되지 않아 3층 계단을 힘겹게 올라올 단골 밥집 최씨 아주머니. 나는 안다, 머리에 인 밥과 국, 예닐곱 가지 반찬의 무게, 염천에 굵은 염주알 같은 땀 흘리며 오르는 고통의 계단, …… 나는 안다, 머리에 인 밥...정민주 기자 2018-07-19 07:00:00
아득하면 되리라 - 박재삼
해와 달, 별까지의 거리 말인가 어쩌겠나 그냥 그 아득하면 되리라. 사랑하는 사람과 나의 거리도 자로 재지 못할 바엔 이 또한 아득하면 되리라. 이것들이 다시 냉수사발 안에 떠서 어른어른 비쳐오는 그 이상을 나는 볼 수가 없어라 그리고 나는 이 냉수를 시...2018-07-12 07:00:00
笑而不言 하나 - 이월춘
환약통을 엎어 조선콩 아니 쥐눈이콩보다 작은 수천 개의 알약을 쏟았다. 온 방 안에 흩어진 짜증과 낭패 머리와 가슴 그리고 입에 가득한 원망과 자책의 단어들이 날개를 단다. 아내는 말없이 빗자루로 쓸고 손으로 줍더니 얼마 안 돼 약통을 다시 채운다. 돌...2018-07-05 07:00:00- 터미널 2 - 이홍섭
강릉고속버스터미널 기역자 모퉁이에서앳된 여인이 간난아이를 안고 울고 있다울음이 멈추지 않자 누가 볼세라 기역자 모퉁이를 오가며 울고 있다 저 모퉁이가 다 닳을 동안 그녀가 떠나보낸 누군가는 다시 올 수 있을까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다며그녀는 모퉁이를 오가며 울고 있는데 엄마 품에서 곤히 잠든 ...2018-06-28 07:00:00
- 늙어 갈수록 - 배종환
드난꾼이면 이해라도 하지 경동시장 짐꾼으로 따라갔다 오자마자 마늘 두 접을 까란다 “까라”는 말은 군대 전역 후 잊은 말이라 새삼스럽지만 살아오면서 속 썩인 일이야 한두 번 있겠지만 해가 바뀔수록 남몰래 속 앓는 날 많아졌다 오전부터 나가시는 아내를 보자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다스리지 못해 막걸리 한 병...2018-06-21 07:00:00
- 조금 비켜주시지 않겠습니까(달개비의 사생활2) - 고형렬
내 잎사귀의 모양만큼만 햇빛이 들어왔다 내 눈에만져진 광량은 환했고 깨끗했다지하에서 음지식물들이 자꾸 기침을 할 무렵식물대는 찢어지면서 물들은 비명을 지르곤 했다새가 날아간 듯 풀들이 놀라 눈을 뜨지만그들은 아무런 장비가 없는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들구불텅한 달걀 외피 모양의 잎사귀뿐아무리 수많...2018-06-14 07:00:00
- 귀밑머리 - 이처기
벙글 때 스미는 꽃향이 아니다 등대 아래 앉았던 갯바위가 식는 달밤튕기는 물방울 함께흩날리며 나부끼던☞ 세계를 육지와 바다로 이분했을 때 갯바위는 육지의 귀밑머리이고 바다에겐 넘어야할 무엇인가 보다. 바다는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갯바위까지 달려갔다가 귀밑머리 하얗게 다쳐서 되돌아가곤 한다. 바...2018-06-07 07:00:00
- 도봉근린공원 - 권혁웅
얼굴을 선캡과 마스크로 무장한 채 구십 도 각도로 팔을 뻗으며 다가오는 아낙들을 보면인생이 무장강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동계적응훈련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제대한 지 몇 년인데, 지갑은 집에 두고 왔는데, 우물쭈물하는 사이 윽박지르듯 지나쳐 간다철봉 옆에는 허공을 걷는 사내들과앉아서 제 몸을 들어올리는 ...2018-05-24 07:00:00
- 성광집.3 (스승의 날) - 이영자
그분들 숨소린가 바람 끝 따스하네옛정 생각나 수첩 폈으니수첩에도 세상에도 자취 없네무심한 세월 야속하구나 가방끈 짧은 나를 먹물 또한 주꾸미 먹물에 불과한 나를 나는 성광대 출신이라 우기는 이유 하나 그분들 식당에 와서 남겨준 지혜들앉은자리에서 공부하는 주모였기에강산이 바뀌도록 재수했기에밥집 문...2018-05-17 07: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