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늘- 김기만
뜨거워야 그늘이 생긴다한낮의 나무들 푸른 잎사귀햇살 쏘이며 반짝반짝 춤춘다눈 찌푸리던 내가 부끄럽다누군가의 그늘에서 땀을 말리며나는 시원하게 웃었을 것이다누군가의 눈물 위에 누워휘파람도 불었을 것이다삶의 무게로 힘들 때그만큼 가벼워지는 것들시소에 앉아 힘줄 때반대편에서 만났을아이들 눈 속의...2015-07-23 07:00:00
- 그리운 나무- 정희성
나무는 그리워하는 나무에게로 갈 수 없어애틋한 그 마음 가지로 벋어멀리서 사모하는 나무를 가리키는 기라사랑하는 나무에게로 갈 수 없어나무는 저리도 속절없이 꽃이 피고벌 나비 불러 그 맘 대신 전하는 기라아아, 나무는 그리운 나무가 있어 바람이 불고바람 불어 그 향기 실어 날려 보내는 기라☞ 그리움이 ...2015-07-16 07:00:00
- 코치의 말- 김제현
‘어깨의 힘을 빼라’홈런을 치려거든목에 든 힘을 빼라출세를 하려거든참으로 아름다워지려거든온몸의 힘을 빼라.☞ “어깨에 힘을 빼!” 야구 코치의 한마디가 시인에게 ‘힘을 빼는 일’에 대한 통찰을 환기합니다. 그렇습니다, 한 타임의 경기에 이기기 위해서도 어깨의 힘을 빼야 하는데 출세라는 난코스, 인생이라는...2015-07-09 07:00:00
- 청포도-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2015-07-02 07:00:00
- 유등- 강희근
내 몸에 글을 써다오나는 흐르고 흐른 뒤 기슭이나 언덕어디 햇빛어디 구름들 아래 이그러지다가생을 마치리라글을 써다오생이라면 글줄이 있어서, 먹물 같은캄캄함이 있어서택배로 사는 노동을 다하다가마감 날 떳떳이 지리라여인이 있다면 여인의 눈썹으로 뜨는 글수자리로 가는 남자 있다면 남자의 태극기로 펄...2015-06-25 07:00:00
- 사람과 개- 김용화
이삿짐이 떠나고강아지 한 마리버려진 가구 곁에오도마니앉아 있었다다음날도다다음날도앉아 있었다발자국 소리날 때마다번쩍,머리를 쳐들었다눈이 오고 있었다☞ 가구를 버리듯이 강아지를 버린 사람과, 주인의 체취가 밴 가구를 지키며 철석같이 주인이 돌아올 것을 믿는 개. 사람답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시 속의...2015-06-18 07:00:00
- 한 줄의 역경(易經)- 강영은
버들다리 아래 흰뺨검둥오리 한 가족이 나들이 나왔다엄마 오리, 구름 한 조각 내려앉은 상류로 상류로 헤엄쳐 간다엄마는 왜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걸까, 갸우뚱거리는 아기 오리들엄마가 내려 보내는 물결을 부지런히 베껴 쓴다세상은 아래로만 흐르는 게 아니란다, 때로는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거란다,한강으...2015-06-11 07:00:00
- 닭서리- 강경주
뒷날 아침 엄니는 욕지거리를 퍼부었다염병에 코 박고 죽을 개뼉따구 같은 놈덜잡히기만 해봐라 그냥 뼉따구를 확 뿐질러 뿔겨, 모가지를 홱 비틀어 뿔겨닭뼈가 배때지를 뚫고 나와 콱 뒈져뿌릴 놈덜그날은 하루종일 가슴이 찔끔거리고닭뼈가 배때지를 뚫고 나오는 것만 같았다☞ 간밤 닭서리의 범인이 설마 아들이...2015-06-04 07:00:00
- 고향- 조승래
아라가야 왕들을 재운 산들이 소몰이 아이들을 내려다본다개울물 졸졸졸 천 년,어느덧 풀들이 다 자라면산은 살짝 아이들 키만큼 등을 낮추었다 풍금소리 들리는 저녁 ☞ 큰 그릇은 품는다. 보시기나 대접이나 종지나 품지 못할 것이 없다. 왕이나 초동(樵童)이나 영웅이나 무지렁이나 품지 못할 것이 없는 그릇, 그...2015-05-28 07:00:00
- 교실은 대초원이다 - 장인수 지금 서로 의견이 갈려서 토론수업을 하고 있는 교실이하느님께서 지으신 자유롭고 광활한 대초원이 아니라면과연 어디겠는가?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풀이 저토록 끈질기게 교실 가득푸르딩딩 자라나고 있겠는가?울부짖고, 뿜질을 하고, 저녁을 끌며 야초를 뜯는 산...2015-05-21 07:00:00
- 길을 쓰는 ‘레이오프’ 여성 노동자- 톈허(한성례 역)
꼭두새벽의 싸늘한 바람이 얇은 옷을 입은 그녀의 몸에 불어와그 표정을 깎아간다 어스름한 가로등 아래그녀는 거리의 먼지를일부는 쓸어내고 일부는 들이마신다그녀는 레이오프 여성노동자, 태어날 때부터 찢어지게 가난하다허나 지금은 길거리가 내 것 같아서부자가 된 기분이다 이토록 기나긴 길을홀로 쓸고 있...2015-05-14 07:00:00
- 미안하다- 유재영
벌서고 돌아오는 길 먹잠자리 향해 함부로 돌 던진 일 미안하다 피라미 목 내미는 여울 물수제비 뜬 일 미안하다자벌레 기어가는 산뽕나무 마구 흔든 일 미안하다 내를 건너다 미끄러져 송사리 떼 놀라게 한 일 미안하다 언젠가 추운 밤하늘 혼자 두고 온 어린별 미안하다, 미안하다☞ 지난날이 돌아다 보인다는 것...2015-05-07 07:00:00
- 플라타너스- 김현승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먼 길에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이제 너의 뿌리 깊이 나의 영혼을 불어 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너스 ...2015-04-23 07:00:00
- 푸른 민주주의- 김소원
한쪽으로 조금만 기우뚱해도논은 더 이상 논이 아니랍니다징게맹게 너른 들에서외배미 용배미 깔딱배미까지저들이 이뤄 낸 소담스런 세상 보세요모양새와 크기 달라도가지런한 이마 선과 푸른 정수리들어깨 낮추어 하늘 받들고 있지요비와 햇살 골고루 나누는이음매 아스라한 저 조각보 아래땅어머니가 차려내 주시...2015-04-16 07:00:00
- 오뉴월- 박철
조부는 비위가 약한 분이었다69년인가 사람이 달나라에 갔다고 요란들일 때마치 요즘 손전화 들고 다니는 거 못 보는 이처럼쾅하고 미닫이문에 찬바람 일으키며저 광활한 우주에 비하면 달나라는 자부동 안이다그깐 거 좀 갔다고아마 조부는 당신이 노닐던 땅뙈기 잃은 양 싶었는지며칠 더 오뉴월 고뿔에 시달렸는데...2015-04-09 07: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