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려한 유적
- 이윤학
무당벌레 한 마리 지금 바닥에 뒤집혀 있다
무당벌레는 지금, 견딜 수 없다
등뒤에 화려한 무늬를 지고 왔는데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화려한 무늬에 쌓인 짐은
줄곧 날개가 되어 주었다
이제 짐을 부려 놓은 무당벌레의
느리고 조그만 발들
짐 속에 갇혀 발버둥치고 있다
☞ 누구나 스스로의 삶...2008-11-07 00:00:00
- 가을엽서
- 강연호
훤칠하게 마른 빗줄기가
잠시 서성거렸습니다
바람 몇 다발 달려가다 넘어져
일제히 다시 구두끈을 조일 때
건널목 무단횡단하던 낙엽들
후이후이 휘파람 불었습니다
한 여자가 보도블록 위에
또박또박 화장을 찍으며 지나가고
동전만 삼킨 자판기를
나는 용서하고 싶었습니다
빈 호주머니 속...2008-11-04 00:00:00
- 물소리 솔바람소리
- 고재종
저 시린 가을물소리
어느 땡초의 목탁소리보단 가을물소리
산 아래 백리까지 끝까지
일거에 화안히 트이는 가을물소리
바람도, 바람도 드맑게 울려나서는
계곡에 들국 마구 터뜨릴 때 가을물소리
내 어느 날 지친 꿈 세상에 던져주고
저기 저만큼 억새꽃 하나로나 흔들릴 때
내 어디...2008-10-30 00:00:00
- 생각하는 자유가 - 박이도
가을엔 돌아가고 싶다
그림자 따라 빈 들에 나서면
사라지는 모두와 결별의 말을
나누고 싶어
기러기처럼
아득히 사라지는 세월, 세월을 향해
아쉬움을 울고 싶다
허연 낙엽은 지고
마른 풀잎은 가볍게 날리는
여기에선 모두가 부산하다
호올로 생각할 수 있는
자유, 허수아비처럼
한참을 서...2008-10-29 00:00:00
- 못 - 최석균
내가 사는 집은
못의 힘으로 서있다
못은
둘을
하나의 상처로 묶는다
상처가 깊을수록
으스러져라 안고
소리를 삼킨다
못은 뒹구는 존재를 세우고
각진 세상을 잇는다.
☞ 우리가 무엇인가를 새롭게 의식할 수 있는 것은 경험을 전제로 한다. 그 경험은 일상성을 넘어설수록 교육적이며 오래 남아 ...2008-10-28 00:00:00
- 음악 -망가진 삶을 위하여
- 이경임
세상에서 아름다운 음악은
망가진 것들에서 나오네
몸 속에 구멍뚫린 피리나
철사줄로 꽁꽁 묶인 첼로나, 하프나
속에 바람만 잔뜩 든 북이나
비비 꼬인 호른이나
잎새도, 뿌리도 잘린 채
분칠, 먹칠한 토막뼈투성이 피아노
실은 모두 망가진 것들이네
하면, 나는 아직도
너무 견고하단...2008-10-27 00:00:00
- 1886년 미국 뉴욕서 ‘자유의 여신상’ 제막
역사 속의 이번 주 (10월 27일~11월 2일)
▲박 대통령 사망 비상계엄령 선포 (1979년 10월 27일)
1979년 10월 26일 밤에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전국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정부는 대통령 궐위에 따라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아 27일 새벽 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2008-10-27 00:00:00
- 종
- 권갑하
제 몸을 때려 고운 무늬로 퍼져나가기까지는
울려 퍼져 그대 잠든 사랑을 깨우기까지는
신열의 고통이 있다
밤을 하얗게 태우는
더 멀리 더 가까이 그대에게 닿기 위해
스미어 뼈 살 다 녹이는 맑고 긴 여운을 위해
입 속의 말을 버린다
가슴 터엉 비운다.
☞ 진정어린 사랑은 화려한 수...2008-10-24 00:00:00
- 단풍잎에 앉은 청산별곡
- 김민정
이마 맞댄 하늘이 눈부시게 푸르른 날
산허리 돌아가다 문득 눈 준 차창 밖에
화들짝, 놀란 청산이 붉디붉게 다가왔다
누군가의 가슴속에 단풍든 적 있었을까
저리도록 아름다움 심어준 적 있었을까
지나온 나직한 삶들 돌아돌아 뵈는 날
명치 끝을 아려오는 저 고운 황홀처럼
누군가의...2008-10-21 00:00:00
- 시월 햇살
- 김차순
달력 속 반라(半裸)의 여자, 반달처럼 웃고 있는
시월도 곁눈질하며 단풍물이 드는 한낮
바람에, 여문 햇살에 드로잉 된 내 사랑
얼룩도 고운 무늬다 공복의 가을에는
구르는 발자국마저 밑줄이 긋고 싶은
내 마음 풀밭 자욱히 벌레처럼 우는 황혼
툇마루 낡은 기둥 꼬리해 쉬어간 뒤
...2008-10-17 00:00:00
- 기다림
- 허철회
신새벽 창 너머에 유난 떠는 물안개
괜스런 수줍음에 옷깃만 저미다가
나절이 훌쩍 지나고 물안개 걷히면
척박한 일상이 맴돌았을 뿐인데
신기루 그루터기에 저문 시선이 꽂혀있다
노청맹(老靑盲) 마른 가슴에 순애보가 새파랗다
☞ 화자는 ‘물안개’로 가려진 ‘창’문 너머에 하나의 세계를 ...2008-10-14 00:00:00
- ‘물처럼’이라는 말 - 김순병
‘물처럼’ 살라는 말 들은 적 있다
입에 물 가득 머금고
호수는 말이 없다
깊은 강은 적막하다
알 길 없는 마음 바닥
제 물에 골몰하다
바다는 그 많은 물 머금고는
잠시도 쉬지 않고
철썩철썩…솨솨
쉴새없이 쓸고 닦는다
짜디 짠 물을 머금은 채
목숨 걸고
소금 젖은 말 놓지 못하는
그 고통
...2008-10-07 00:00:00
- 고지대
- 김교한
고지대 사람들은 밤마다 등을 달아
도시를 건져 놓고 잠들자 날이 새면
지하철 바람을 타고 어디론가 가야 한다.
가까웠던 눈빛들을 기억에서 밀어내고
낯선 바닥으로 세월 속에 묻혀 가는
그들을 아무도 모른다 허한 축대를 공구고 있는.
☞‘고지대’란 시어가 지닌 반어적 이미지가 쓸쓸하다...2008-09-30 00:00:00
- 먼지들의 정거장
- 김운화
시들고 싶어
썩고 싶어 속삭이는데
그대, 화초라고 해서 만져보고
화초가 아니라고 해서 간사히
손가락을 퉁기지 마
푸른 잎에서 머물고 싶었던 먼지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바퀴를 굴리잖아
알겠니, 꿈꾸는
플라스틱 붉은 입술에
흰 눈의 입술들이 도킹하고 있어
☞ 우리가 살아가...2008-09-26 00:00:00
- 후회
- 정공량
바위틈에 숨어서 피는 꽃을 본다
어디 살 데라곤 없어서
여기와 살고 있는 너를 본다
세상 때문이라고,
너 때문이라고,
말 잘 듣지 못해,
말 잘 하지 못해,
헤어진 너를 생각한다
너 때문이라고
너 때문이라고 원망한 많은 날들
바위틈에 숨어 피듯
지금은 내 가슴 속에 숨어서
활...2008-09-23 00: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