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날에 힘쓰다
- 양곡
지난 겨울
굵고 짧게 살자던
맹세 다 잊었는가
풀잎 먼저 불끈불끈 살아난다
지리산도 끙끙
함께 힘쓰는 봄
-시집 동인지 제2호 ‘하늘이 바다를 만날 때’에서
☞ 참으로 지루하고 긴 한 해가 가고, 참혹한 겨울도 다 가고 있다. 이 겨울의 막바지에 아직 지표는 어둡고 사뭇 고요하지...2009-01-30 00:00:00
- 희망- 정희성
그 별은 아무에게나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 별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자기를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의 눈에나 모습을 드러낸다
-시집 ‘돌아다보면 문득’에서
☞ 별은 희망이요, 어둠은 절망이다. 어둠이 없으면 별은 빛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절망이 없으면 희망이라는 것도 없다. 절망하는 자기 안에서...2009-01-23 00:00:00
- 아침- 나기철
올레 끝
동백나무 아래
새 한 마리
서성이다
날자
꽃 하나
핫
떨어진다
-<작은詩앗·채송화> 동인지 제3호『하늘우물』(고요아침)에서
☞ 새 한 마리의 몸짓에도 반응하는 것이 우주다. 그 우주만물의 미묘한 움직임에 또한 가장 순연하고 민감하게 조응하는 존재가 바로 시인...2009-01-20 00:00:00
- 입신
입신 - 박정애
범도 맨손에 두들겨 잡을, 아니
번쩍 들어 저잣거리 내동댕이칠 나이
결코 명예롭지 않은 명퇴로
가재 털어 낸 횟집 때맞춘 비브리오
새들도 생병이 나는 세상이라
오리불고기 삼계탕 치킨 미친 소갈비
파리만 날리다 내부수리 신장개업
이골 난 노래방 김사장
아, 아, ...2009-01-16 00:00:00
- 동백연가(冬柏戀歌)
동백연가(冬柏戀歌)
- 윤효
네가 너무 보고 싶었다, 투욱, 투우욱, 투우우욱, 툭.
-시집『햇살방석』(시학)에서
☞ “투욱, 투우욱, 투우우욱, 툭.”은 의성어일 수도, 의태어일 수도 있다. 꽃, 혹은 눈물이 떨어지는 소리일 수도 있고, 못내 반가워서 등을 치는 몸짓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꽃이면 어떻고, ...2009-01-13 00:00:00
- 일곱 살, 우주(宇宙)
일곱 살, 우주(宇宙)
- 함순례
바람이 들썩이는 호숫가
비닐돗자리 손에 든 아이가
풀밭으로 걸어간다
신발 벗어 한 귀퉁이 두 귀퉁이
메고 온 가방 벗어 세 귀퉁이
마지막 귀퉁이에 제 몸 내려놓는다
삼라만상을
돗자리에 전부 모셨다
-시집 ‘뜨거운 발’(애지)에서
☞ 일곱 살 아이에게 제 신은 신발...2009-01-06 00:00:00
- 별
- 복효근
등 하나 켜고
그것을 지키기 위한 한 생애가
알탕갈탕 눈물겹다
무엇보다, 그리웁고 아름다운 그 무엇보다
사람의 집에 뜨는 그 별이 가장 고와서
어스름녘 산 아래 돋는 별 보아라
말하자면 하늘의 별은
사람들이 켜든 지상의 별에 대한
한 응답인 것이다
-시집 ‘목련꽃 브라자....2009-01-02 00:00:00
- 사랑, 붉은
사랑, 붉은
- 정일근
은현리 들길 걸어가다
가을소풍 마치고 하늘로 돌아간
고추잠자리 한 마리 보았습니다
또 한 마리의 고추잠자리
그 주검 곁을 지키며
오래 날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 미물들도 저리 붉게
사랑했나 봅니다
제 몸과 색깔 다 벗고
모두 돌아가는 이 늦가을까지
-동인지 제3호...2008-12-30 00:00:00
- 신방(新房)
- 유재영
한 마리는 무릇꽃에서 날아왔고 다른 한 마리는 청미래 덩굴이 고향이다 오배자 동쪽 가지에서 첫날밤을 보낸 무당벌레 신혼부부, 아, 이 산중에도 나뭇잎 셋방 하나 더 늘어나겠구나
- ‘내일을 여는 작가’ 2008 겨울호
☞ 겨울, 숲을 생각한다. 나뭇잎마다 세 낸 방에서, 아주 편한 잠에 들...2008-12-26 00:00:00
- 고요한 연못
고요한 연못 - 조정권
물 위를 헤엄친 눈송이,
그 寒生.
그 분은 침묵이었네, 한 번도 발설되지 않은 침묵.
-계간『현대한국시』, 2008 여름 창간호에서
☞ 머리로는 도저히 해독되지 않는 시, ‘고요한 연못’을 한참이나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가 한 순간, 어떤 심연 속으로 아득히 빠...2008-12-23 00:00:00
- 미국을 생각하며 - 박구경
뜨거워지는 물을 피해 두부 속으로 파고드는 미꾸리
눈 깜짝할 사이에
무역센터로 들어간 한 세기 초유의 증오이고 싶다
한 사람이 또 떠나가는 의료원 앞
숟가락을 들다가 말고
바글바글,
지난 세기를 모두 뚝배기에 섞어 넣고
밤새도록 온 우주로 알 수 없는 신호를 띄워 보내는
텔레비전
한...2008-12-19 00:00:00
- 홍시
홍시
- 이 안
어머니가 갓난 내 불알 두 쪽
바라보신다
아무도 물어가지 못하게
가장 쓰고 떫은 것으로
채우셨으나
아,
지금 내 몸이 너무 달다
-시집 ‘치워라, 꽃!’에서
☞ 이쯤 되면, ‘동화’냐 ‘투사’냐를 가리기가 쉽지 않다. 아니, 무의미하다. 완벽한 물아일체의 상태, 바로 여기서 시는 탄...2008-12-16 00:00:00
- 내 마음의 지도
- 김경미
천천히 심장 속을 들여다보니요
끊어질 듯 이어지는 단풍길과
거기, 리아스식 해안과 아픈 톱니들 사이 다도해 어둠들
제풀에 섬이 되어
주먹밥 크기로 놓여 있는 눈물도 보여요
너무나 오래 헛되고 외로웠으며
어찌 다스릴 수 없었던 몇채의 무너짐,
그리움들은 많이도 줄 끊어져 나부끼고
사...2008-12-03 00:00:00
- 황야의 이리 2
- 이건청
탱자나무가 새들을 길들이듯
저녁부터 새벽까지 어둠이 되듯
침묵하겠다.
풀들이 장수하늘소를 숨긴 채 풀씨를 기르듯
봄부터 가을까지 침묵하겠다.
이빨도 발톱도 어둠에 섞여 깜장이 되겠다.
나는 짖지 않겠다.
말뚝 가까운 자리에 엎드려
바람 소릴 듣겠다.
떨어진 가랑잎들을 몰고 가는 바람...2008-11-25 00:00:00
- 너는 꽃이다
- 이도윤
나는 오늘 아침
울었습니다
세상이 너무 눈부시어
울었습니다
어디서 날아왔을까
아파트 10층 시멘트벽 물통 사이
조막손을 비틀고 붉게
온몸을 물들인 채송화 하나
그래도 나는 살아 있다
눈물인 듯 매달려 피었습니다
무릎을 꿇는 햇살 하나
그를 껴안은 채
어깨를 떨고 있습니다
☞ 생...2008-11-14 00: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