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김치-황시은
꽃김치
- 황시은
진해 충무공복지관에 들어서니 그가 내게로 왔다 노란 잠바 입은 시창작반 선배가 유채밭으로 달려간다 피어나는 유채꽃대를 꺾어 입으로 가져간다 꽃김치를 먹는다 김치이-뒤에 서 있던 칼 찬 동상이 옷매무새를 슬쩍 만진다 카메라 셔터가 혀를 날름거린다
- 시집 『난 봄이면 입덧을 한...2009-05-08 00:00:00
- 진해역-이우걸
진해역
-이우걸
시트콤 소품 같은 역사 지붕 위로
누가 날려 보낸 풍선이 떠 있다
출구엔 꽃다발을 든
생도 몇 서성이고,
만나면 왈칵
눈물이 쏟아질 듯한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그 순백을 만나기 위해
이 나라 4월이 되면
벚꽃 빛 표를 산다.
- 시집 ‘나를 반해온 시간의 발자국이여’에서
☞ 한겨...2009-04-28 00:00:00
- 바람-이부용
바람
- 이부용
우리는 바람 바람이어라
남지 유채꽃밭으로 달려가지 않는
언덕이 좋아서 언덕에 머무는 저 유채꽃의
멱살 흔들며
노란 빛깔 내놔라
생떼 부리는 바람의 마음이어라
겨울 언저리에 부르튼 아픔 꿰맨 채
바람으로 울고
바람으로 웃고
바람으로 잠들다
바람 때문에 깨어난 흔들림 없...2009-04-24 00:00:00
- 몸 5 -손영희
몸 5
- 손영희
고요로 항변하는 잡목 숲에 불을 당기면
우르르 난데없는 수맥이 깊은 동굴 구멍 숭숭 뚫린 난간 밑으로 흐르고
나는 발이 빠져 수수천년 무릉도원 도화녀 꽃 속의 나비 어르는 순진무구
의 거침없는 여자가 되어
달디단 모반의 사랑아
꿈속에서 평생이 간다.
- 제3호에서
☞ ‘무...2009-04-17 00:00:00
- 짐 (유행두)
하느님, 누구 것입니까? 발신자 없는 등짝에 에덴동산 주소가 적혀 있는데
저한테 온 게 아닌 줄 알면서 허락없이 풀어본 죄로, 너무 일찍 탈이 나서
물크러진 삶, 무거워서 들지도 못하는 生, 쓰레기통도 꽉 차서 버릴 곳 없는데,
대학병원 중환자실은 보관료도 비싼데 하느님, 누가 이 짐을 저에게 잘못 보낸
...2009-03-31 00:00:00
- 廣原-백석
廣原
- 백석
흙꽃 이는 이른 봄의 무연한 벌을
輕便鐵道가 노새의 맘을 먹고 지나간다.
멀리 바다가 뵈이는
假停車場도 없는 벌판에서
차는 머물고
젊은 새악시 둘이 나린다.
☞ 2000년대 현재, 한국 시인들은 왜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이상도 아니고, 김소월도 아니고, 정지용도 아니고, 김수...2009-03-10 00:00:00
- 아버지의 새벽 2
- 공 영 해
늦잠도 죄스러운
워낭소리
낭랑랑
쇠죽
뜸 지우던 솔가리 불,
낮은 기침소리
오십년
저쪽의 세월
아직도 날
깨우다.
- 중에서
☞ 독립영화 ‘워낭소리’가 전국 관객 200만을 넘겼다 한다. 나는 이 영화를 몇 주 전에 관람했다. 이 시가 영화 ‘워낭소리’와 정확히...2009-03-03 00:00:00
- 비정성시
- 김경주
시인은 신이 놓친 포로다 그러나 포로는 늘 프로다
내가 가진 유일한 능력은 너와 다르다는 것이다
내가 졌다!라고 쓰는 것은 내가 단지 이길 수 없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너와 다르다는 이유로 이곳에 산다
그것이 너한텐 꽤 중요한가 보다.
☞ 신은 천재다. 나는 신의 포로를 면할 수 있...2009-02-27 00:00:00
- 불모산
- 송 창 우
불모산 가는 길에는 여섯 개의 로타리와 달의 협곡에 걸린
구름다리가 있고 천 걸음마다 서 있는 일주문에는 줄무늬 흰
전갈과 눈 셋 달린 수리 까마귀가 산다. 까마귀 눈이 푸른 날엔
길이 허락되지만 까마귀 눈이 붉은 날엔 길은 꼬리를 자르고
달아난다.
- 2009-02-24 00:00:00
- 만행(卍行)
- 이지엽
여름에는 나무들이 땅으로 길을 내지만
겨울에는 하늘로 길을 내나 봅니다.
선명한 잔가지의 실핏줄들이 모조리
미세한 촉들을 하늘 우물에 담근 채
파르르 떨면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삼배三拜하며 맨발로 걸어가는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습니다.
-동인지 제3호‘하늘 우물’에서
☞ ...2009-02-20 00:00:00
- 폭설 -공광규
폭설
- 공 광 규
술집과 노래방을 거친
늦은 귀갓길
나는 불경하게도
이웃집 여자가 보고 싶다
그래도 이런 나를
하느님은 사랑하시는지
내 발자국을 따라오시며
자꾸자꾸 폭설로 지워주신다
-시집 ‘말똥 한 덩이’(실천문학사)에서
☞ 이렇듯 남의 허물은 덮어주고, 자기 허물은 마음속 티끌 하나도 ...2009-02-17 00:00:00
- 병어회와 깻잎
- 안도현
군산 째보선창 선술집에서 막걸리 한 주전자 시켰더니 병어회가 안주로 나왔다
그 꼬순 것을 깻잎에 싸서 먹으려는데 주모가 손사래치며 달려왔다
병어회 먹을 때는 꼭 깻잎을 뒤집어 싸먹어야 한다고, 그래야 입 안이 까끌거리지 않는다고
-시집『간절하게 참 철없이』(창비)에서
☞ 하필 이 시...2009-02-13 00:00:00
- 기계의 말
- 표 성 배
닦고 조이고 기름치고 어쩌다 스위치를 내리고 데모를 하는 것은 내 마음과 네 마음을 함께 전하는 것이다
이런 내 마음 잘 알기에 쌩쌩 잘 돌아가다 갑자기 멈추는 일은 극히 드물지만, 달리 네 마음을 전할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을 때는 데모를 하는 경우도 있어 나도 당황할 때가 있다
-시집 ...2009-02-10 00:00:00
- 귀
- 서정춘
하늘은 가끔씩 신의 음성에겐 듯 하얗게 귀를 기울이는
낮달을 두시었다
-시집 ‘귀’ (시와시학사)에서
☞ 하늘도 ‘신의 음성’을 들으려고 귀 기울이고 계신데, 하물며 사람을 받들라고 사람이 내세운 사람이 사람의 말을 도무지 듣지 않으려 드니, 도대체 이 무거운 죄업을 어쩌려는 것일까?
...2009-02-06 00:00:00
- 시가 있는 간이역
고사목을 보며
- 박두규
자꾸만 변해야 한다고
변해야 살아남는다고 하지만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냐고 하지만
사는 일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변하는 것은 나를 살리는 궁리이고
변치 않는 것은 너를 위한 궁리인 것 같다
무엇보다도 내가 본 세상의 아름다움은
아직도 변치 않는 것들에 ...2009-02-03 00: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