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연론- 정일근
풀 한 포기 밟기 두려울 때가 온다
살아 있는 것의 목숨 하나하나 소중해지고
어제 무심히 꺾었던 꽃의 아픔
오늘 몸이 먼저 안다
스스로 그것이 죄인 것을 아는 시간이 온다
그 죄에 마음 저미며 불안해지는 시간이 온다
불안해하는 순간부터 사람도 자연이다
-정일근 ‘자연론’ 전문
(시집 ‘기다린다는 것...2010-09-02 00:00:00
- 갈매기살- 김혜연
나도 날고 싶었던 적이 있었지 뭐니
살찐 가슴에는 출렁출렁 파도가 일고
네 다리를 가볍게 펄럭거리며 새처럼 날고 싶었지 뭐니
의지와 상관없이 펑펑 터져오르는 신나는 이 기억을
하필이면 다짜고짜 내 늑골 한 켠에 부적처럼
가장 먼 곳의 이름으로 달아 주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지 뭐니
(중략)
욕심 많은...2010-08-26 00:00:00
- 개심사 종각 앞에서- 최영철
무거우면 무겁다고 진즉 말씀을 하시지 그러셨어요
이제 그만 이 짐 내려달라 하시지 그러셨어요
내가 이만큼 이고 왔으니
이제부터는 너희들이 좀 나누어 지라고 하시지 그러셨어요
쉬엄쉬엄 한숨도 쉬고 곁눈도 팔고
주절주절 신세타령도 하며 오시지 그러셨어요
등골 휘도록 사지 뒤틀리도록 져다 나른 종소...2010-08-19 00:00:00
- 별- 성선경
아차 순간 내 헛디딘 잘못 하나로
그만 정한수 사발이 깨어져 흩어졌습니다.
이렇게 깨어진 사금파리들이
저 하늘에 가득 찼습니다.
나는 얼마나 잘못하며 살아왔을까요?
이젠 발 디딜 틈이 없습니다.
☞ 삶의 편린과 상처를 긁어모아 시화하는 일에 온몸을 던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 마음의 그릇이 ...2010-08-12 00:00:00
- 명편(名篇)- 복효근
채석강 암벽 한구석에
종석♡진영 왔다 간다
비뚤비뚤 새겨져 있다
옳다 눈이 참 밝구나
만 권의 서책이라 할지라도 이 한 문장이면 족하다
사내가 맥가이버칼 끝으로 글자를 새기는 동안
그녀의 두 눈엔 바다가 가득 넘쳐났으리라
왔다 갔다는 것
자명한 것이 이 밖에 더 있을까
한 생애 요약...2010-08-05 00:00:00
- 시간의 흔적- 김연동
의미 없이 꽂혀 있는 오래된 서책처럼
지나간 시간의 흔적 그 끈을 쥐고 앉아
휘어진 정강이뼈만
쓸고 또 쓸어 본다
증후성 신경통은 시비 걸듯 일어나고,
침묵도 짐 되는 듯 초침소리 높아가는
내 방안 가난한 이력
앞무릎이 시리다
☞ 인간의 목숨이 다하는 날은 욕망의 끈을 놓는 날이다. 너무도 ...2010-07-29 00:00:00
- 바람이 운다는 말- 서일옥
바람이 운다는 말 여기 와서 처음 알았네
창녕군 부곡면 한골부락 50번지
칠원댁 내 어머니가 여든 해나 살아온 집.
다 뜯긴 창호지 문
문살만 남은 안방
그 안방 못 잊어서
요양병원 몰래 나와
버선발 종종거리며
어둠 속을 달려온 집
모시인 양 하늘하늘 볼에 닿던 그 바람
이제는 울음이 되어 ...2010-07-22 00:00:00
- 어머니- 김영재
전화기 속에서 어머니가 우신다
“니가 보고 싶다” 하시면서
나는 울지 않았다
더욱더
서러워하실 어머니가 안쓰러워
어릴 적 객지에서 어머니 보고 싶어 울었다.
그때는 어머니
독하게 울지 않으셨다
외롭고
고단한 날들 이겨내야 한다고
언제부턴가
고향도 객지로 변해
어머닌 객지에서
외로움에...2010-07-15 00:00:00
- 은유의 돌- 김춘랑
끝내는 무너지리다
그대의 성, 견고한
허언과 감언으로
식상한 들풀들이
눈부신
청기와 용마루를
눈 흘기고 있나니,
차라리 묵묵부답하는
돌이 되리라
온 세상 석공들이
날선 정으로 쪼아
정수리 으깨어지고
피 흘린다 할지라도
☞ ‘율’동인으로 향토문화를 선도하며 평생을 시조와 더불어 살아온 ...2010-07-08 00:00:00
- 그 여름의 명상- 유재영
섬진강 물소리가 평사리를 지날 때
소린 없고 빛만 남아 마른 들을 적시더라
은어도 하늘빛 닮아 반짝이는 이런 날
지리산 어린 바람 오던 길로 달아나고
비 개인 대숲으로 맑게 트인 산새 울음
초록빛 오, 저 사투리 화두처럼 듣는다
☞ 섬진강 푸른 물빛으로 그려놓은 그리움을 주조로 한 작품이다. 평소 유...2010-07-01 00:00:00
- 세속- 박기섭
씻어도 씻어도 끝내
오욕의 때는 남아
내 누린 환희도 희열도
그 죄다 사치였음을
창 너머 불현듯 부푸는
목련 보고 아느니
☞ 세속은 보통 사람들의 삶의 현장이다. 사람이 사는 공간인 세속은 오욕의 환유이고, 세속 위에 꽃잎 부푸는 목련은 순백의 상징이다. 어느 날 시인이 바라본 창 너머엔 환한 목련이...2010-06-24 00:00:00
- 매화 눈 뜨다- 박재두
매화 눈 뜨다 - 박재두
눈 못 뜰 진눈깨비 속 내맡긴 이 가슴팍
한 가닥 핏줄을 감고 손톱 밑까지 와서
부르튼 살을 헤집고 토닥토닥 불티가 난다.
고추 타는 연기 천한 눈물 짓이기어
기우고 꿰맨 누덕 그 거친 살갗에도
파랗게 불티가 난다. 한점 뼈끝을 깨고……
☞ 故 박재두 시인은 탁월한 언어 감각을 ...2010-06-17 00:00:00
- 중원, 시간여행- 윤금초
몸 낮출수록 우람하게 다가서는 저 산빛
떡갈나무 잡목숲 흔들고 오는 문자왕 그의 호령
중원 고구려비 돌기둥 휘감아 도는데 들리는가, 산울림
우렁 우렁 일렁이는
찾찾찾찾자되찾자…… 기찻소리, 하늘의 소리
☞ 윤금초 시인의 사설이다. 사설시조는 조선중기 산문정신의 발아로 평민층의 관심을 끌기 시작...2010-06-10 00:00:00
- 어느 날 문득- 김교한
어디에도 발 디딜 징검다리 보이지 않는
거울 속 들어 앉은 미완성 설경 한 폭
넘어 온 산이며 들판이며, 멀리 뻗는 지하수맥
☞ 늘 다니던 길을 걷다가 문득 뜻밖의 깨달음을 얻게 된다거나, 직관으로 인해 삶의 새로운 변화를 맞기도 한다. 이 시조는 거울을 보다가 문득 자신의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보고 있는...2010-06-03 00:00:00
- 벚꽃 길-사월을 생각하며- 이상범사랑이 지나는 길은
지상 어디고 꽃길이다
꽃 속에 꽃으로 나부끼며
꽃이고자 했던 그들
삼십 년 전에 이 꽃길로
꽃을 밟은 그는 없다.
천상의 꽃으로 떠난
그의 발자취 또한 꽃
사람이 주인인 꽃은
마침표가 없는 꽃
올해도 그 꽃길을 따라
아이들이 가고 있다.
☞ ‘사랑’은 가장 아름다운 말 가운데 하...2010-05-27 00: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