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설의 저녁- 박은주
아파트 후문 트럭가게로
꿀빵 달라며 사내아이가 뛰어든다
호떡을 굽던 여자가
눈과 입꼬리로 대답을 건네는
묵음의 단내 환한 저녁 모퉁이에
자전거 한 대, 꼬꾸라진 채로 바퀴를 굴리고 있다
가방은 가방대로
철제바구니는 그것대로 나동그라진 저만치
여자가 탱탱한 악다구니를 뭉쳐
소년의 귓바퀴에 쑤...2010-12-23 00:00:00
- 둥글어지기 전- 강현덕
둥글어지기 전
말한 적 있었던가
나는 무기고였단 거
너를 향한 창들이
내게 가득했단 거
뒤집힌 허파 한쪽엔
비수도 꽂혔었단 거
네 말을 토막 낼 혀
밤마다 갈았다는 거
자물통 채워놓고
퍼렇게 갈았다는 거
내 몸이 둥글어지기 전
그때는 그랬다는 거
-강현덕, ‘둥글어지기 전’ 전문(‘서...2010-12-16 00:00:00
- 낙엽의 詩- 임성구
석류알 같은 한 줌 빛 와르르 쏟는 시월 오후
붉은 발자국 찍는 노란구두 한 켤레가
바스락
땅 위에 시를 쓴다
태곳적 붓을 들고
폭풍이 몰아치는 얼음의 강을 지나
벌나비 춤추던 알싸한 초원도 지나
매미가 목청을 돋우던 통증 멀리 사라진 언덕
은행나무가 줄지어 레일을 만드는 동안
불면의 밤은 또 ...2010-12-09 00:00:00
- 시간의 그늘- 성윤석
보내지 않을 수 있는데도 보내준다.
내버려두면 더 좋았을 법 싶은데도
손가락으로 꾹, 눌러본다. 추운데도
창문을 열고 비를 들인다. 어두운데도
불을 켜지 않고
물지 않는데도 나방을 덮쳐버린다.
그리고 고요…… 내가 만든 오랜 고요
나는 늙는다.
날이 갈수록 사랑은
더욱 무서운 것이라서,
내 눈 끔...2010-12-02 00:00:00
- 뼈가 떴다- 이주언
꽃 지고
잎 다 진, 겨울 도읍지에서
나무의 뼈들을 바라본다
골골 ― 보일러 돌지 않는 집처럼
얇은 햇살 귀퉁이에 어깨를 뉘고 걱정마라 내사 괘얀타마
삭정이 같은 두 발로 아랫목 더듬는 사람들
생을 지탱시킨 힘
제 살 다 내어준 뒤에야 드러난다
(중략)
오리무중의 늑골 사이를 유영해도
지상에 ...2010-11-25 00:00:00
- 얼굴반찬- 공광규
옛날 밥상머리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이 있었고
어머니 아버지 얼굴과
형과 동생과 누나의 얼굴이 맛있게 놓여있었습니다
가끔 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먼 친척들이 와서
밥상머리에 간식처럼 앉아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외지에 나가 사는
고모와 삼촌이 외식처럼 앉아있기도 했습니다
이런 얼굴들이 ...2010-11-18 00:00:00
- 사람을 쬐다- 유홍준
사람이란 그렇다
사람은 사람을 쬐어야지만 산다
독거가 어려운 것은 바로 이 때문, 사람이 사람을 쬘 수 없기 때문
그래서 오랫동안 사람을 쬐지 않으면
그 사람의 손등에 검버섯이 핀다 얼굴에 저승꽃이 핀다
인기척 없는 독거
노인의 집
군데군데 습기가 차고 곰팡이가 피었다
시멘트 마당 갈라진 틈새...2010-11-11 00:00:00
- 살구꽃- 송찬호
살구꽃이 잠깐 피었다 졌다
살구꽃 양산을 활짝 폈다가
사지는 않고
그냥 가격만 물어보고
슬그머니 접어 내려놓듯이
정말 우리는 살구꽃이 잠깐이라는 걸 안다
봄의 절정인 어느 날
살구꽃이 벌들과
혼인비행을 떠나버리면,
남은 살구나무는 꽃이 없어도
그게 누구네 나무라는 걸 훤히 알듯이
재봉...2010-11-04 00:00:00
- 지구의 눈물- 배한봉
둥근 것들은 눈물이 많다, 눈물왕국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칼로 수박을 쪼개다 수박의 눈물을 만난다
어제는 혀에 닿는 과육 맛에만 취해수밀도를 먹으면서 몰랐지사과 배 포도알까지 둥근 몸은 모두달고 깊은 눈물왕국 하나씩 가지고 있다는 걸
나는 눈물왕국을 사랑하는 사람입맛 없을 때마다 그 왕국에 간다
...2010-10-28 00:00:00
- 이웃- 이정록
아이들이 공부하고 있으니
두부장수는 종을 흔들지 마시고
행상트럭은 앰프를 꺼주시기 바랍니다
크게 써서 학교 담장에 붙이는 소사 아저씨 뒤통수에다가
담장 옆에 사는 아줌마 아저씨들이 한마디씩 날린다
공일날 운동장 한번 빌려준 적 있어
삼백육십오일 스물네 시간 울어대는
학교 종 한번 꺼달란 적 있...2010-10-21 00:00:00
- 낮달- 김일태
깍짓손 팔베개에
가을이 아늑하다
밀물로 깊어진
하늘바다
벗어 가난한 힘으로 떠서
평형으로 헤엄쳐 건너가는 저
하늘새
가벼운 날갯짓에
물결 하나 일지 않고
구름섬 몇 떠서 보금자리 차려내어도
단호히 비켜 가는
흰 기러기 한 마리
-김일태, ‘낮달’ 전문(시집 ‘바코드속 종이달’, 시학 2009)...2010-10-14 00:00:00
- 꽃단추- 손택수
내가 반하는 것들은 대개 단추가 많다
꼭꼭 채운 단추는 풀어보고 싶어지고
과하게 풀어진 단추는 다시
얌전하게 채워주고 싶어진다
참을성이 부족해서
난폭하게 질주하는 지퍼는 질색
감질이 나면 좀 어떤가
단추를 풀고 채우는 시간을 기다릴 줄 안다는 건
낮과 밤 사이에,
해와 달을
금단추 은단추처럼...2010-10-07 00:00:00
- 수련(睡蓮)- 이월춘
수련은 민무늬의 추억을 갖고 있다
그 추억의 쇄골에 어깨를 기대고
햇빛이 가장 순수하고 뜨거울 때
가벼운 번민 하나 없이
단 사흘을 피고 지고 피고 지다가
영원히 물로 돌아가 침묵 속에 잠기는 수련
찰나의 문을 지나 영원으로 들어가는 몰입의 의미여
침묵과 고요 속에서
말이 이루어지고 스스로 깊어가...2010-09-30 00:00:00
- 그 여름의 끝- 이성복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2010-09-16 00:00:00
- 생애전환기- 박서영
의료보험 공단에서
생애전환기의 건강검진통보를 보내왔다
환승역에 닿아서 겨우 종이 한 장 받은 기분이다
겨우 몇 걸음 걸었을 뿐인데
어디로 갈아타야 할지 모르는데
발부터 머리꼭대기까지 잔뜩 긴장해서
통보서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무서운 병명들이 빼꼭히 적혀있다
위꽃, 유방꽃, 자궁경부꽃...2010-09-09 00: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