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경산수(眞景山水)- 성선경자식이라는 게젖을 떼면 다 되는 줄 알았다새끼라는 게 제 발로 걸어집을 나가면 다 되는 줄 알았다시도 때도 없이-아버지 돈그래서 돈만 부쳐주면 다 되는 줄 알았다그런데 글쎄어느 날 훌쩍 아내가 집을 나서며-저기 미역국 끓여 놓았어요-나 아들에게 갔다 오겠어요나는 괜히 눈물이 났다이제는 내 아내까지 넘보다니...2011-11-17 01:00:00
- 시곗바늘- 박서영삽 세 자루가 누군가의 얼굴을 파내고 있다사라지는 시간의 작은 외침이 재깍재깍 들린다눈썹을 밀고, 눈알을 파내고, 코와 입을 지웠다한 바퀴 돌고 돌아와 지운 얼굴을 또다시 지운다 삽은 또 구덩이를 판 후 물컹한 것들을 파묻기 시작한다 사라지는 시간의 작은 외침이 퍽퍽퍽퍽 들린다머리카락 한 올 없는 저 둥근 ...2011-11-10 01:00:00
- 권투선수는 이렇게 말했다- 김태형왜 내가 여기서 흠씬 두들겨 맞아 쓰러져 있는지어떤 미친개가 내 안에서 또더러운 이빨로 생살을 찢고 기어 나와 몸을 일으키는지나는 두 눈으로 똑바로 봐야 한다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얻어맞아 곤죽이 되는 것보다그래도 보이는 주먹이 더 견딜 만하다누가 나를 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개는 어둠을 향해 짖을 수...2011-11-03 01:00:00
- 콩나물- 박성우너만 성질 있냐?나도 대가리부터 밀어 올린다-시집 ‘거미’(2002. 창비) 중에서☞ 중장년층에게 이 시를 읽히면 피식, 웃음부터 터뜨립니다. 왜냐구요? 콩나물이 나고 자라는 특성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지요. 우리 어릴 적에는 집집마다 윗목에 콩나물시루가 놓여 있어서 그 콩나물 나고 자라는 걸 자동적으로 보았기 ...2011-10-27 01:00:00
- 혜화역 4번 출구- 이상국딸애는 침대에서 자고나는 바닥에서 잔다그 애는 몸을 바꾸자고 하지만내가 널 어떻게 낳았는데…그냥 고향 여름 밤나무 그늘이라고 생각한다나는 바닥이 편하다그럴 때 나는 아직 대지(大地)의 소작(小作)이다내 조상은 수백 년이나 소를 길렀는데그 애는 재벌이 운영하는 대학에서한국의 대 유럽 경제정책을 공부하거...2011-10-20 01:00:00
-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정재학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비가 오기 시작하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날도 어두워지기 시작하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하늘이 죽어서 조금씩 가루가 떨어지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나는 아직 내 이름조차 제대로 짓지 못했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피뢰침 위에는 헐...2011-10-13 01:00:00
- 동박새- 김두안그는 동박새도시에서 집을 짓는 그는빨간 코팅장갑을 끼고철근 몇 가닥 어깨에 메고 휘청거리며 계단을 올라가요목수들 망치소리 들려와요동백은 저렇듯 멍울로 꽃 피워요산이 쩌렁쩌렁 붉어요핑 쇳소리 내며 떨어져요참 헐렁해요녹슨 꽃을 밟기도 해요피멍이 든 못 자국 망치로 두들겨요바람은 차갑고 도시는 안전화보...2011-10-06 01:00:00
- 작업일지 10-추락물에 대하여- 최석우리는 경직되어 있다.한 면만이 날이 서 있다.맑은 날, 이 도시의 흡반 근처를 배회하다 보면삐꺽이는 불륜의 콧소리가 보인다.저기 번쩍이는 외벽 뒤에 숨은 앙상한 뼈다귀,불치의 골절, 그 사이사이로 내통하는 귓속말과위태한 추락물들.미려할수록도도할수록 가볍게 건드리기만 하면,호 하고 불기만 하면,무너져 내...2011-09-29 01:00:00
- 하현- 도종환반쪽 달빛으로도 뜰이 환하다산딸나무 흰 잎이 달빛으로 더욱 희게 빛나서산 짐승들 길 찾기 어렵지 않겠다중국에서 왔다는 발효차를 달여 마시며고적(孤寂)의 뒤를 따라오는 호젓함을 바라본다숲의 새들도 고요의 죽지에 몸을 묻고입술을 닫은 한밤중잔별 몇 개 따라나와밤의 한 귀퉁이 조금 더 윤이 나는데남은 몇 모...2011-09-22 01:00:00
- 딸레- 송진권앵두나무 아래서딸레를 데리고 가자쬐그만 아주머니는 두고 가자바구니에 담아둔 앵두는 뒤엎고물크러지기 시작한 앵두는 흔들어 떨구고앵두나무 그늘도 흩어버리자바늘로 딸레 눈을 찌르고딸레를 안고 어르며머리를 빗겨 주고곱게 화장을 시켜 내 각시를 삼자방울을 흔들면딸레는 노래하고 춤을 추고딸레는 눈이 먼 채 ...2011-09-15 01:00:00
- 냉기- 이준규새가 한 마리 책상 위에 있다누군가 새의 목을 비튼다손이 보이지 않는다나와 자리를 바꾼다검은빛이 하얗게 섞인다-시집 ‘흑백’ 중에서☞허, 참, 뭐 이런 시가 다 있노?바보 같은 독자들이여. 투덜거리지 말고 잘 보시라. 분명한 것은 <나>와 <새>, <새>와 <나> 둘뿐. 그 외의 것은 <검은빛...2011-09-08 01:00:00
- 이자의 종말- 맹문재대출 이자 때문에 자살했다는 농부의 얘기를 들으며종말을 생각한다어제는 의사도 자살했는데뉴스가 되지 않았다이자 부담이 소비를 둔화시킨다는 기자의 보도 역시담배 연기처럼 흩어졌다후식까지 챙기며 미래에 살고 있는 내가종말을 떠올리다니대출 이자를 갚지 못한 사람들이 연일 자살해도여전히 차들이 굴러가고...2011-09-01 01:00:00
- 사랑의 지옥-序詩 -유하정신없이 호박꽃 속으로 들어간 꿀벌 한 마리나는 짓궂게 호박꽃을 오므려 입구를 닫아 버린다꿀의 주막이 금세 환멸의 지옥으로 뒤바뀌었는가노란 꽃잎의 진동이 그 잉잉거림이내 손 끝을 타고 올라와 가슴을 친다그대여, 내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나가지도 더는 들어가지도 못하는 사랑이 지독한 마음의 잉잉거림,난 지...2011-08-25 01:00:00
- 걸레질하는 여자- 김기택걸레질을 하려면 무릎을 꿇어야 한다.허리와 머리를 깊이 숙여야 한다.엉덩이를 들어야 한다.무릎걸음으로 공손하게 걸어야 한다.큰절 올리는 마음으로아기 몸의 때를 벗기는 마음으로 닦지 않으면방과 마루는 좀처럼 맑아지지 않는다.어디든 떠돌아다니고 기웃거리고틈만 보이면 비집고 들어가 눌러앉는 먼지들오라는 ...2011-08-18 01:00:00
- 아들과 함께 보낸 여름 한 철- 이상국아들과 천렵을 한다 다리 밑에서 웃통을 벗고땀을 뻘뻘 흘리며 소주를 마시며나도 반은 청년 같았다이제서 말이지만 나는 어려서 면서기가 되고 싶었다어떤 때는 벌레가 되고 싶기도 했다그래도 나는 시인이 되었다그게 어디 쉬운 일이냐아들아 제발 시인에 대해 신...2011-08-11 01: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