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래된 정원- 손영희(시조시인)오래된 정원아궁이 불쏘시개 지천으로 널려있다구름이 새를 좇는 장복산 편백나무 숲아침녘 수제비 떠 넣은 무쇠 솥이 끓고 있다어머니 몸 그 몇 배 높이 쌓은 성채 하나살신(殺身)을 꿈꾸는 조붓한 저 등허리산 하나 통째로 이고 와 햇살로 부려놓는다잘 썩은 고요와 잘 마른 그늘이오늘도 까시래기 내 배냇잠 부풀린...2012-10-18 01:00:00
- 순천만 서정(抒情)- 임성구(시조시인)혼자 걷는 순천만엔 바람이 픽! 웃는다 환한 대낮 안개등 켜고 갈대에게 길 묻는데 소름이, 돋은 갯벌 위로 게 한 마리 지나간다찢어진 발자국을 독주(毒酒)로 지운 그 자리저만치 은빛 물결이 돌아오는 참게의 집 방고래 온기 먹는 소리 겨울새가 먼저 안다 살짝 열린 입술 새로 남도 민요 한 가락에노랑부리 물총새가 ...2012-10-11 01:00:00
- 편력- 이정환(시조시인)1바람에 기대어 비탈에 선 적이 있다구름 깔고 앉아 멀리 흘러간 적이 있다하늘빛나비와 같이스러져간 적이 있다2어느 뉘 눈빛 속에 숨어든 적이 있다그 가슴 찢을 듯 가시 돋친 말끝에어둠에 에워싸여서옥죄인 적이 있다3더는 내딛지 못할 벼랑 끝에 섰을 때바닥을 치며 올라오는 절망의 힘을 본다내 안에들끓는 마그...2012-10-04 01:00:00
- 부자상(父子像)- 정완영(시조시인) 사흘 와 계시다가 말없이 돌아가시는 아버님 모시 두루막 빛바랜 흰 자락이웬일로 제 가슴 속에 눈물로만 스밉니까어스름 짙어오는 아버님 여일(餘日) 위에꽃으로 비춰드릴 제 마음 없사오매생각은 무지개 되어 고향 길을 덮습니다.손 내밀면 잡혀질 듯한 어릴제 시절이온데할아버님 닮아가는 아버님의 모습 뒤에...2012-09-27 01:00:00
- 바람이 연잎 접듯- 유재영(시조시인)어린 구름 배밀이 훔쳐보다 문득 들킨절지동물 등 높인 이끼 삭은 작은 돌담벽오동 푸른 그림자 말똥처럼 누워 있다고요가 턱을 괴는 동남향 툇마루에먹 냄새 뒤끝 맑은 수월재 한나절은바람이 연잎을 접듯 내 생각도 반그늘차 한 잔 따라놓고 누군가 기다리다꽃씨가 날아가는 방향을 바라본다어쩌면 우리 먼 그때, 약속...2012-09-20 01:00:00
- 산정(山井) 마을- 공영해(시조시인)9월 산정 아람 벌자물빛도 단풍입니다어디서 소 울음소리산초 향을 피우는데폐교엔 녹슨종소리명아주로길 자라고- 공영해 시집 <천주산, 내 사랑>에서☞ ‘구월아’ 하고 부르면 파란 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하늘이다. 흰 구름을 배경으로 만국기가 펄럭이고 운동장을 달리던 아이들, 마른 기억의 골목길에 가을...2012-09-13 01:00:00
- 미조리 사랑- 강경주(시조시인)삶이 너무 숨가쁘면마음을 유배 보내는 곳꽃뱀 같은 해안 길 따라 미조리에 가 보시라파도가 가슴을 치다쓰다듬어 주는 곳포구의 한숨소리 수평 너머 잠재우고품안 가득 차는 밀물 늘 설레는 미조항(彌助港)선잠 깬애기동백꽃이빠알간 울음 우는 곳우연히 서로 보듬고 하루종일 뒹굴어도몽돌같이 둥근 마음아프지 않은 ...2012-09-06 01:00:00
- 종.1- 강호인(시조시인)난 이제한 개의 종돌종(石鐘)쯤 되어울고 싶다세상 허허롭기가 하늘보다 깊은 날도사람 무심하여 눈물 절로 어리는 날도새벽녘 까치처럼 가야 할 은혜로운 땅에서삼생을 삼천 번쯤 윤회로 돈다 해도목숨 삼긴 날이면 살아서 푸른 세월혼신의 열정을 다해 스스로를 彫琢하는전설 속 석수장이 명품 빚는 석수장이그 아린 ...2012-08-30 01:00:00
- 처서- 박명숙(시인)귀뚜라미가 돌아왔다못갖춘마디로 운다허물 벗은 첫 소절이 물먹은 어둠을 파고든다낯익은울음을 만날 때도모노드라마로 운다가슴에 목젖을 묻고초사흘 달처럼 운다덜 여문 곡절들이 풀씨보다 쌉싸름하다가다가낯선 울음 채이면 귀청을 딸각, 끄기도 한다- 박명숙 시집 <은빛 소나기>에서☞ 계절에도 꼭짓점이 있...2012-08-23 01:00:00
- 들풀.1- 민병도(시조시인)허구헌 날 베이고 밟혀 피 흘리며 쓰러져놓고 어쩌자고 저를 벤 낫을 향기로 감싸는지…… 알겠네 왜 그토록 오래 이 땅의 주인인지 - 민병도 시조집 <들풀>에서☞ 지금쯤 그곳에는 머리카락 풀어 헤친 듯 바람에 마구 흔들거릴 것이다. 흔들리면서도 결코 쓰러지지 않고 ‘피 흘리며 쓰러져 놓고’ 다시 일어서는 들...2012-08-16 01:00:00
- 그리운 우물- 박옥위(시조시인)산과 산 사이의 경계는 안개가 가린다, 못 잊을 기억들이 산인 듯 에워싸도시간의 차창 밖으로 날아가는 새가 있다아득한 경계 사이에 그리운 우물 있다. 아직도 날 풍뎅이 수풀 속을 헤매는 날, 한 번씩 물 긷는 소리 첨버덩 들려온다켜켜이 자란 초록은 첩첩이 깊어 있어, 시정(市政)에 잡힌 생각이 먼지 같다 싶다가...2012-08-09 01:00:00
- 기억을 날리다 -잠자리 - 이처기(시조시인)잠자듯 가벼이 저 멀리 떠난다투명하게 헹군 자락 고요히 유영하는 훨 훠훨 손에 잡힐 듯잡히지 않는 기억이쟁여 있는 얼룩을 찾아 균형 잡은 은빛 날개잠자리 날개 망 사이로 우주가 잠겨 간다덧없이 이어져가는무상한 생애를 업고수많은 망과 망 사이 하늘하늘 떠가면서출렁이는 꿈도 꾸며 물구나무도 서 가면서기우...2012-07-26 01:00:00
- 꽃 또는 절벽- 박시교(시조시인)누군들 바라잖으리,그 삶이꽃이기를더러는 눈부시게활짝 핀감탄사기를아, 하고가슴을 때리는순간의절벽이기를- <네 사람의 노래>에서☞ 타오르는 정열의 꽃! 누군들 꽃 같은 삶을 바라지 않으랴. 더러는 눈부시게 피어나는 생을 꿈꾸지 않으리. 예술의 극치에 가 닿은 절정의 순간을 꽃인들 바라지 않겠는가. 언어...2012-07-19 01:00:00
- 근조화- 이달균꽃들이 영안실에 부동자세로 서 있다목발에 의지한 덧없고 창백한 도열언제나 벽을 등진 채 배경이 되고 만다관계를 맺지 못한 사자(死者)와의 시든 동행한 번도 저를 위해 피고 지지 못했던목 잘린 꽃들의 장례, 순장(殉葬)은 진행형이다- 이달균 시집 <장롱의 말>에서☞ 영안실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맞이하는 ...2012-07-12 01:00:00
- 새 아침- 김춘랑(시조시인)망설이다놓쳐버린숱한 그세월 뒤에창가에 피어있던베고니아꽃잎 같은아니면 칠칠한 대숲울어예는 새 소리 -김춘랑 시조집 <새 꽃바침 노래>에서☞ 그러니까 물처럼 흘러 갔을게다. ‘숱한 그 세월’ 붙잡을 겨를도 없이 바람처럼 오늘을 또 놓치고 만다. 밤의 그림자가 술렁이면 곧 싱그러운 꽃술 드러내는 아침, 겨...2012-06-28 01: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