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래 익은 사랑- 이태희 늦은 밤 찬밥을 나누고귤 한 봉지 둘레로모여 앉은 식구들미끄러운 세월의 껍질한 겹씩 벗겨내면열 조각으로 나뉘는이 시린 겨울밤은 깊어가고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둥글게 모여 앉은 식구들이어둠의 각질을 뚫고 퍼져나가저마다 푸른 잎사귀 펄럭일 때까지제 몫의 오래 익은 사랑 나눌 때까지☞ 이 세상에서 가족 사...2014-12-18 11:00:00
- 세상의 모든 어미- 이지엽
남자들은 가래로 뻘 파 쉽사리 잡지만
여자들은 힘이 달려,
몸뚱아리가 연장이여
팔 걷고 쑤셔 넣다 보면 어깨까지 다 닿는겨
줄에다 산 낙지를 묶어서 손에 달고
살째기 집어넣으면
속에치 꼬셔 나오제
으찌나 잽싼지 몰라 깜빡 하믄 나만 망해불어
알 까고 죽은 낙지는 살 썩어도 냄새...2014-12-11 11:00:00
- 묵죽(墨竹)- 손택수 습자지처럼 얇게 쌓인 숫눈 위로소쿠리 장수 할머니가 담양 오일장을 가면할머니가 걸어간 길만 녹아읍내 장터까지 긴 墨竹을 친다아침해가 나자 질척이는 먹물이 눈 속으로 스며들어 짙은 농담을 이루고눈 속에 잠들어 있던 댓이파리발자국들도 무리지어 얇은 종이 위로 돋아나고어린 나는 창틀에 베껴 그린 그림 한 ...2014-12-04 11:00:00
- 사랑의 길- 윤후명 먼 길을 가야만 한다말하자면 어젯밤에도 은하수를 건너온 것이다.살 길은 늘 아득하다몸에 별똥별을 맞으며 우주를 건너야 한다그게 사랑이다언젠가 사라질 때까지그게 사랑이다☞산다는 일이 참 아득하게 느껴지는 분들 많으실 테지요? 하루하루 사는 일이 힘에 겹고 아무리 희망을 떠올려 보려 해도 아무것도 보이지...2014-11-27 11:00:00
- 고갯길- 고영조
우리 할배 웅남장에 소 팔러 가실 때 송아지 팔지 말라고 울며 떼쓰는 나에게 “울지 말고 있거라 송아지 팔아서 자전거 사줄게” 하셨다 그러나 할배는 여우가 나온다던 밤이 돼도 안 오시더니 한밤중에 나를 깨워 고갯길 가리키며 “저기 고개에서 할배가 탁! 넘어져 자전거가 그만 산 아래로 굴...2014-11-20 11:00:00
- 겨울 지리산- 이경 사람도 짐승도 먹을 것 없는 밤이 길었다풀 먹은 닥종이 한 겹을 사이에 두고새끼 가진 승냥이가 문밖에 와서 울었다포식자들이 득실거리는 야생의 밤우리에겐 호롱불 하나와 어머니가 있었다☞ 아슬아슬한 줄다리기. 창호지 한 장을 격한 채 목숨과 목숨이 팽팽하게 줄을 당깁니다. 승냥이의 배고픔의 힘과 어머니의 ...2014-11-13 11:00:00
- 야채사(野菜史) - 김경미 고구마, 가지 같은 야채들도 애초에는꽃이었다 한다잎이나 줄기가 유독 인간 입에 달디단 바람에꽃에서 야채가 되었다 한다달지 않았으면 오늘날 호박이며 양파들도 장미꽃처럼 꽃가게를 채우고 세레나데가 되고검은 영정 앞 국화꽃 대신 감자 수북했겠다사막도 애...2014-11-06 11:00:00
- 저곳- 박형준 공중(空中)이란 말참 좋지요중심이 비어서새들이/ 꽉 찬 /저곳그대와/ 그 안에서 방을 들이고/ 아이를 낳고냄새를 피웠으면 공중이라는말뼛속이 비어서하늘 끝까지날아가는 새떼☞ 철새들이 돌아오는 시절이 되었습니다. 하늘이 문득 물러서면서 허공에 자리를 내어주면 그렇게 넓어진 공간만큼이 새들의 차지가 되겠...2014-10-30 11:00:00
- 임방울- 송찬호 삶이 어찌 이다지 소용돌이치며 도도히 흘러갈 수 있단 말인가그 소용돌이치는 여울 앞에서 나는 백 년 잉어를 기다리고 있네어느 시절이건 시절을 앞세워 명창은 반드시 나타나는 법유성기 음반 복각판을 틀어놓고, 노래 한 자락으로 비단옷을 지어 입었다는 그 백년 잉어를 기다리고 있네들어보시게. 시절을 뛰어넘...2014-10-23 11:00:00
- 월훈(月暈)- 박용래
첩첩 산중에도 없는 마을이 여긴 있습니다. 잎 진 사잇길 저 모래 둑, 그 너머 강기슭에서도 보이진 않습니다. 허방다리 들어내면 보이는 마을. 갱(坑)속 같은 마을. 꼴깍, 해가, 노루꼬리 해가 지면 집집마다 봉당에 불을 켜지요. 콩깍지, 콩깍지처럼 후미진 외딴집, 외딴집에도 불빛은 앉아 ...2014-10-16 11:00:00
- 강물- 천상병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흐르는 그 까닭은언덕에 서서 내가 온종일 울었다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밤새 언덕에 서서해바라기처럼 그리움에 피던그 까닭만은 아니다언덕에 서서내가 짐승처럼 서러움에 울고 있는 그 까닭은강물이 모두 바다로만 흐르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그리운 쪽으로 돌아서고 있네요. 나도 모르는 사이...2014-10-02 11:00:00
- 노을, 기차를 타다- 이일림 노을이 산꼭대기를 감싸 안고 있다 아직도 눈부시다아무도 부르지 않는 저 꼭대기에 하루도 건너뛰지 않고 날아가는 황조 한 마리 느낌이 때로 일생일 때가 있다 오늘도 어김없이 저녁밥을 안친다 쉬릭 쉬릭, 밥솥의 추가 돌기 시작한다 가을을 무르익히고 나온 당찬 쌀알들 그리움이 많은 것처럼 서로 모여 할 말도 많...2014-09-25 11:00:00
- 벚꽃- 이영탁 바람의 살결이던 나뭇잎 모두 지고앙큼하게 드러낸 뼈의 무늬 어찌하리 눈빛도 숨 막혀 황홀한 바람의 뼈 꽃 되다누군들 사랑 한 번, 이별 한 번 없었으랴편지에 아름답다 써놓고 돌아서면첫사랑 애절했던 시간도 흠뻑 젖는 덧붙임☞ 웬 벚꽃이야 그녀는 왜 아직도 지나간 계절 타령이야. 바람에 살결을 드러낸 채 떠나...2014-09-18 11:00:00
- 동거- 성명남 담장 안의 호박 줄기가 목을 길게 빼고생면부지의 감나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혼자서는 곧게 설 수 없는 줄기의 생이손 잡아줄 누군가를 향하여 먼저 다가선 것이다늙은 감나무를 위해 덩굴손의 방향을 바꿔 놓고 노끈으로 잘 묶어 두었지만이미 뜨거워진 감나무의 가슴에 손을 넣어 본 뒤였는지하룻밤 사이 다시 몸을...2014-09-11 11:00:00
- 사과- 정푸른 속살을 아는 이여이가 닿은 곳을 시간이라고 하자갈변하는 인연의 색깔에 이유를 달지 말자거기는 눈물이 닿지 않는 곳아무도 돌아가지 못할 그믐이다베어 문 자리에서 돋아난 기억은물병자리 여인의 시큼한 암내 같은 것눈물이 마른 자리에서 기어 나오는,저녁으로 건너가는사람아정체를 들키지 말고 사라지자아직 덜 ...2014-09-04 11: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