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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6월 26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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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담화문 - 돌을 치우자

  • 기사입력 : 2006-04-19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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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터전이자 동시에 기쁜 소식의 핵심이고 희망의 근거이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그리스도인들의 실존과 삶의 방식을 결정한다. 그래서 우리는 부활의 진정한 의미를 거듭 묻지 않을 수 없다.

      초대교회의 부활 신앙이 출발하는 과정을 살펴보자. 그 부활 신앙은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 여인들이 무덤으로 찾아가는 이야기로부터 출발한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이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시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여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확신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시체를 찾는다. 죽음을 죽음의 틀 안에 고정시키려고 한다. 죽음을 뛰어 넘는 또 다른 세계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외면한다. 예수님의 부활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인들은 누가 무덤의 돌을 치워줄 것인가를 걱정한다.

      여기서의 돌은 죽음의 세계를 가두어 놓으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돌은 이미 치워져 있다. 이로써 죽음의 돌은 언제나 죽은 자들 위에 닫혀 있으리라 생각하는 죽음의 논리에 처음으로 도전이 생겨난다. 무덤은 열려 있을 뿐 아니라 비어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무덤이 비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을 통해 계시는 무너지고 신비만 남게 된다. ‘빈 무덤 - 부활’의 도식을 이제는 ‘부활 - 빈 무덤’의 도식으로 바꾸어야 한다. 먼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고. 그것의 표지가 바로 비어 있는 무덤이다. 열려 있고 비어 있는 무덤에서 역사의 새로운 문이 열리는 것이다.

      부활의 의미를 헤아리면 이제 그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의 삶을 짓누르고 있는 무거운 돌을 치우면 생명을 다시금 되찾게 될 것이다. 무덤을 막은 돌은 우리의 삶의 흐름을 왜곡시키는 장애를 상징한다. 우리 가운데 제법 많은 분들이 돌에 짓눌려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우리를 짓누르는 돌은 여러 가지이다.

      그것은 우리가 앓고 있는 질병일 수도 있고. 어떤 지적인 관념일 수도 있으며. 정치적 또는 사회적 제도일 수도 있다. 그것은 또한 우리를 얽어매는 온갖 부자유일 수도 있으며. 양심의 고통. 심리적 억압과 불안. 타인을 향한 증오심과 적개심일 수도 있다. 나만이 지고 가야할 과거의 짐일 수도 있다. 그것은 또한 지나친 소유욕과 물욕. 명예와 권력의 추구일 수도 있으며. 교만. 아집. 독선. 이기심일 수도 있다. 이런 돌에 짓눌려 살아가는 한 우리는 부활의 삶을 살지 못한다. 부자유하다. 살아 있다는 말을 들으면서 살고 있으나 실상은 죽음을 살고 있다.

      그러므로 부활의 삶이란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돌을 치우는 것이다. 치워진 돌은 죽음을 이긴 생명을 상징한다. 그것은 우리가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돌을 치우면 우리 안에 죽어 썩어갔던 많은 것들이 다시금 생명을 회복한다. 그렇게 되면 불안과 부자유의 사슬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된다. 해방감을 느끼며 넉넉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우리의 삶을 짓누르고 있는 온갖 돌을 치우고 부활의 삶을 살기로 다짐하는 우리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큰 축복과 평화를 내려주시기를 청한다.(안명옥 주교·천주교 마산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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