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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8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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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시론] 피고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판결서- 이수정(창원대 명예교수철학자)

  • 기사입력 : 2024-03-05 19:3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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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적 유희 삼아 일종의 ‘모의재판’을 열어본다. 단, 현실에서의 재판지연 현상에 질렸을 독자들을 위해 모든 심리과정을 생략하고 곧바로 판결만 소개한다.

    주문: 피고 포스트모더니즘은 유죄. 삶의 세계로부터 향후 100년간 추방형에 처한다.

    청구 취지: 피고는 1960년대 프랑스의 데리다, 리오타르, 보드리야르 등이 내건 탈근대주의/탈이성주의의 깃발 아래, 전통적인 이른바 ‘거대서사’를 탈피하고 ‘작은 이야기’로 사고의 패턴 전환을 시도하면서 전 지구적으로 각광을 받아 철학, 예술, 문학, 비평, 건축, 디자인, 마케팅/비즈니스, 역사해석,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피고는 그 영향력 확대의 과정에서 고의 혹은 미필적 고의로 그동안 인류생활에 결정적 기여를 해온 근대화 및 이성주의에 대해 공격을 가하였고 그 결과 이들에게, 특히 ‘원대한 꿈’에 대해,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혀 전 인류의 삶에서 그 질적 저하를 야기한 바가 결코 작지 않으므로 그 손해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이에 ‘인류의 현재와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본 철학법정에 대해 피고의 유죄 단정과 적절한 처벌을 청구하였다.

    양형 이유: 피고의 언설은 유혹적으로 달콤했다. 특히 데리다가 주도한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 레비스트로스가 주도한 문명에 대한 비판, 리오타르가 주도한 ‘거대서사’에 대한 비판, 보드리야르가 주도한 실재에 대한 비판, 등은 미모의 휴머니즘과 결탁하여 알게 모르게 소외되고 주눅 들어 있었던 주변/야만/‘작은 이야기’/시뮬라크르(가상실재) 등에 힘을 실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막강한 테크놀로지와 자본주의를 등에 업고 오히려 이들로 하여금 무대 중앙에 서게 했다.

    전 세계의 개인들은 그 무대에 열광하며 그 방향으로 삶을 내달렸다. 이는 물론 만유에 부여된 아프리오리한 ‘존재의 권리’를 고려할 때 그 정당성이 인정된다. 단 존재의 권리는 ‘거시적 시야’를 포함한 타자와의 조화로운 공존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럼에도 피고는 시대의 조류에 편승해 거의 혁명적-파괴적으로 기존의 ‘근대적인 것들’ ‘이성적인 것들’을 무대에서 축출했고 이윽고 빈사의 상태로 내몰았다. 그 결과가 현재 목격되고 있는 보편적 천박화, 희망의 상실, 가치론적 아나키즘이다.

    이러한 일종의 각개주의/목하주의가 무한한 욕망과 결탁하면서 이성의 통제를 벗어났고 무절제한 물질주의/자본주의를 부추겨 자연까지도 훼손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환경파괴/기후변화/과도경쟁/인구문제까지도 야기하기에 이르렀다. ‘나만/우리만/지금만’ 하는 이기주의도 이런 방향과 무관할 수 없다. 이른바 소확행이라는 사탕발림도 그 연장선에 있다.

    이 모든 문제들의 핵심에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본질적으로 내재된 ‘탈이성’이 있다고 본 재판부는 판단한다.

    이성은 현재의 문명을 낳은 부모에 해당하는바 그것을 내다버리고 방치한 것은 일종의 패륜으로 볼 수 있으며, 그 죄과가 무겁다고 아니할 수 없다. 이에 본 철학법정은 피고의 혐의 사실에 대해 상당부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단, 피고의 행적 중 소외자에 대한 가치발견과 권리회복은 작지 않은 공로로 인정되므로 양형에 참작하여 추방령에 그치며 그것도 일단 100년으로 제한한다. 100년은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의 10배라 길다면 길지만 유장한 역사의 길이에서 보면 잠시 한동안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향후 100년간 피고가 없는 상태에서 인류가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면서 또다시 ‘소외’의 문제가 재발한다면 그때는 피고가 되돌아와 새로운 형태의 ‘리-포스트모더니즘’을 꽃피울 수 있도록 그 여지는 남겨두는 바이다.

    이수정(창원대 명예교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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