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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7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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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을 위한 헌신, 경남 참전 영웅을 찾아서] ① ‘17세 소년병’ 박상기씨

총탄 피하며 탄약 날랐다… 목숨 걸고 싸운 ‘화천 고지전’

  • 기사입력 : 2024-01-11 00:0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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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들은 행복해진 순간마다 잊는다. 누군가가 우리들을 위해 피를 흘렸다는 것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제32대 대통령은 이같이 말했다. 전쟁은 기억해야 한다. 현재 생존해 있는 경남 지역 6·25참전유공자 수는 2370명이다. 평균 연령은 93세이다. 연도별로 보면 △2018년 5956명 △2019년 5058명 △2020년 4307명 △2021년 3584명 △2022년 2874명으로 매년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올해 창간 78주년을 맞는 경남신문은 자유 대한민국을 지킨 ‘참전영웅’을 기록하는 기획을 시작한다. 이미 잘 알려진 백선엽 장군, 맥아더 장군만이 전쟁영웅은 아니다. 우리 주변에서 그저 평범해 보이는 참전 용사들도 전부 영웅이다. 소총수, 의무병, 통신병 등 병과가 무엇이었든, 전방에 있었든 후방에 있었든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청춘을 바쳤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영웅이다. 한 분 한 분 역사인 만큼 기록해야 하고, 기념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본지는 경남 지역 참전 영웅들을 만나고 기록해 이들에 대한 재평가와 함께 예우의 현실을 짚어보고자 한다.


    매일 고된 노동에 끼니 걱정하다
    17세 때 무장공비토벌대로 참전
    호남 곳곳에 숨은 인민군과 전투

    전쟁 막바지 육군 편입돼 강원도로
    전력공급 요충지 화천댐 사수 목표
    육탄전으로 중공군 맹공 맞서 승리

    “죽은 전우 등 전쟁의 참상 생생
    6·25전쟁은 휴전… 안보의식 중요
    과거로 돌아가도 다시 참전할 것”


    1951년 17세 나이로 6·25전쟁에 참전한 박상기씨가 거울을 보며 참전 유공자 제복을 매무시하고 있다./성승건 기자/
    1951년 17세 나이로 6·25전쟁에 참전한 박상기씨가 거울을 보며 참전 유공자 제복을 매무시하고 있다./성승건 기자/

    ◇17세 나이에 전장 속으로= “너무 어리고 배가 고프니 뭣도 모르고 전쟁 속으로 뛰어들었지. 전쟁이 처음 터졌을 때만 해도 대한민국을 이렇게 바꿔 놓을 줄 몰랐는데….”

    박상기(93)씨는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7살의 나이에 무장공비토벌대로 참전한다. 그는 전쟁 속에서도 매일 고된 노동과 농사를 지어도 끼니 걱정을 해야 했다. 그가 살고 있던 의령에는 낮에는 국군이, 밤에는 숨어 있던 인민군이 찾아왔기에 삶은 더 힘들었다. 한쪽 편이라도 서면 살 수 있겠지 하는 생각에 무장공비 토벌대원으로 전쟁에 뛰어들었다.

    6·25전쟁은 전방뿐 아니라 후방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1950년 9월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미처 북으로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과 부역자들은 남한 곳곳에 숨어 있었다. 이들은 경찰서를 비롯한 관공서를 습격해 치안을 불안하게 하고, 주민들을 공격하는 등 수많은 피해를 줬다. 이에 정부는 공비토벌대를 조직해 소탕 작업을 펼친다.

    그는 1953년도까지 공비토벌대원으로 호남 지역에 숨어 있는 인민군들과 전투를 치렀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인민군들의 필사적인 저항에 여러 차례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도 있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육군의 수가 부족해져 그는 공비토벌대에서 육군으로 편입된다.


    "소총수로 간 전우가 얼마나 죽었는지도 몰라..."ㅣ탄약 수송병의 기억ㅣ6.25 참전영웅을 기록하다

    ◇목숨 걸고 싸운 고지전= 그는 짧은 임시 훈련을 받고 치열한 고지전이 펼쳐진 강원도 화천 지역으로 배치됐다. 그가 맡은 병과는 탄약병이었다. 휴전을 맞은 해 화천 지역은 땅 한 뼘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한 치열한 고지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영화 ‘고지전’의 실제 배경지가 ‘화천 425고지’였을 정도로 치열했고, 처절했다.

    특히 화천에 있는 당시 주요 전력 공급원이었던 화천댐은 아군과 적군에게 꼭 필요한 요충지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인식해 화천댐 사수를 지시하고, 7월 화천을 사수하고 있던 2군단 사령부를 방문해 독려하기까지 했다. 전략 요충지였던 425고지는 중공군 대부대 맹공에 맞서 국군이 육탄전을 벌인 끝에 승리해 사수할 수 있었다.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전우들을 위해 탄약을 나른 탄약병들은 인민군의 매복 공격에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 “탄약을 실은 수송차들이 전선 근처로 갈 때 곳곳에서 인민군들이 매복해 공격했지. 인민군들이 기관총, 수류탄으로 수송차를 공격하면, 싣고 있던 폭약으로 인해 차량 전체가 폭발했기에 많은 탄약병들이 목숨을 잃었어. 운이 좋아 살아서 전선에 가 탄약을 옮기면, 군복에 피가 안 묻은 군인이 없을 정도로 다치거나 죽은 이들이 많았어. 이제 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만약 나도 소총수로 배치됐다면 살아서 집에 못 돌아왔을 거야.”

    박상기씨가 6·25전쟁 참전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성승건 기자/
    박상기씨가 6·25전쟁 참전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성승건 기자/

    90이 넘은 영웅은 아직도 전쟁의 참상을 생생히 기억한다. 인터뷰 내내 그의 목소리는 정확했고, 기억은 또렷했다. 그는 아직도 총을 맞거나 포탄으로 인해 죽은 전우들 모습이 생생하다. “전쟁 한가운데 있으면 수시로 전우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지만, 그가 진짜 죽었는지도 확인을 못 해. 전사 소식을 너무 많이 접해 무섭기도 했지. 탄약을 건네받은 아군들은 인민군과 목숨을 걸고 싸웠지.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두 눈으로 보니 전쟁이란 것은 절대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더군.”

    전투도 치열했지만, 전쟁 그 자체를 견디는 것도 힘겨웠다. 인민군의 매복과 식량 부족으로 보급 상황이 좋지 않았다. 보급이 오지 않아도 전투는 치러야 했으니 수많은 군인들이 배고픔을 이기고 전투에 임해야 했다. 무엇이 가장 힘들었냐는 질문에 그는 먹을 것 자체가 없는 게 무섭고 걱정됐다고 했다.

    박상기씨가 6.25전쟁 참전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성승건 기자/
    박상기씨가 6.25전쟁 참전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성승건 기자/

    1953년 7월 27일. 3년간의 전쟁이 휴전됐다. 휴전 직전까지 요충지 확보를 위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화천에서 박상기씨는 휴전 소식을 전해 들었다. 라디오에서 휴전이 됐다는 소식이 들리자 총소리가 멈췄고, 탄약 수송 임무도 중단됐다. 휴전 소식을 들은 그는 별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단지 이제 전쟁터로 안 가겠구나. 살아서 집에 가겠구나라는 생각뿐.

    휴전 이듬해 봄 전후방 부대 교대가 있었다. 그는 후방 지역 부대에 배치됐고, 군인 숫자가 적어진 탓에 장기 복무를 요청받아 그 길을 택했다. 이후 군인으로 5년을 근무한 뒤 1958년 제대를 했다.

    제대 후 고향으로 온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 진해에서 농사일을 시작했고, 나중에는 작은 두부 공장을 차려 아들 4명을 키웠다.

    박상기씨의 병무 소집 해제증./성승건 기자/
    박상기씨의 병무 소집 해제증./성승건 기자/
    박상기씨 집 대문 기둥에 걸려있는 국가유공자의 집 현판./성승건 기자/
    박상기씨 집 대문 기둥에 걸려있는 국가유공자의 집 현판./성승건 기자/

    ◇“다시 돌아가도 참전하겠다.”= 전쟁을 직접 겪은 그는 국민들이 강한 안보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대한민국은 옆에 화약고를 둔 상황이야.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나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남 일이 아닌 거지. 6·25전쟁은 휴전을 한 거지, 종전을 한 게 아니니 언제든 전쟁이 다시 벌어질 수 있어. 난 아직도 북한이 미사일을 쐈다고 하면 무섭고 두려워. 미래 세대들한테 부탁하고 싶은 것은 강한 안보로 전쟁이 다시 벌어지지는 않는 것. 그것뿐이야.”

    그는 항상 6·25전쟁 참전유공자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다.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켰다는 자부심이 수많은 역경 속에서 그를 지탱해 주었다. 고령이지만 유공자회 활동에도 적극 참여해 유공자 복지 증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인터뷰 때도 그는 곧게 다린 참전유공자 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나라를 위해 젊은 청춘을 바쳤지만, 어렵게 살고 있는 유공자들이 많아 안타깝다고 했다. ‘일류 보훈’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유공자들이 나라를 지켰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 수 있어야 하고, 시민들은 그런 유공자들을 존경하며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훈이 제대로 안 이뤄진다면 누가 전쟁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겠냐고 그는 되물었다.

    박상기씨의 가슴에 6·25전쟁 참전 유공자 뱃지가 달려있다./성승건 기자/
    박상기씨의 가슴에 6·25전쟁 참전 유공자 뱃지가 달려있다./성승건 기자/

    ‘6·25전쟁 당시로 돌아가도 다시 참전할 것이냐’라는 질문에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강하게 말했다. “고민 없이 나라를 위해 전쟁터로 달려갈 거야. 지금도 17살의 나이에 전쟁에 참전한 일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어. 군인으로 싸울 수 없다면, 노무병으로라도 전쟁에 참전해 나라를 구하는 데 일조하고 싶어. 이 다짐은 절대 변하지 않아.”

    박준혁 기자 pjhnh@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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