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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0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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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지방신문협회 공동기획] 최진석의 老莊的(노장적) 생각

성스러운 삶은 불편을 감수하거나 자초한다

  • 기사입력 : 2017-11-14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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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몇 마디 말을 나눠보지도 않았지만, 괜히 믿음이 가는 사람이 있다. 많은 말을 나누고도 뭔가 허전한 느낌만 남기는 사람이 있다. 여럿이 모여서 어떤 일을 결정할 때 마지막 매듭을 짓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꼭 있다. 강의를 듣고 나서 강의 내용을 물고 늘어져 자기 멋대로 다음 이야기를 구성해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강의 내용을 기억하는 데에만 집중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듣고 나서 죄다 흘려보내버리는 사람도 있다. 똑같은 내용의 얘기를 들어도 사람마다 반응은 모두 다르다. 같은 내용에 각자 다른 반응을 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같은 일에 각기 다른 깊이로 반응하는가?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근거, 즉 그 사람만의 바탕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일에 분개하면서 정작 자신도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들이 쓰레기 버리는 일을 탓하지 않고 묵묵히 봉지 하나를 들고 집을 나서는 사람도 있다. 기차를 탔을 때 전화가 오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통로로 나가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안하무인 격으로 앉은 자리에서 전화 통화를 하는 사람도 있다. 다른 사람의 글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것으로 날을 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묵묵히 마음을 내려놓고 자신만의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 밖에서는 민주를 외치지만, 집에 오면 독재자로 변하는 사람도 있다. 책을 읽을 때 질문이 마구 샘솟듯이 일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책 내용을 수용하기만 하는 사람도 있다. 환경 보전을 외치면서 일회용 컵이나 접시들을 마구 쓰는 사람이 있는 있는가 하면 철저히 자제하는 사람도 있다. 주장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각각이 따로인 사람도 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달라지는가.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근거, 즉 그 사람만의 바탕이 다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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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필용 作 ‘덕’

    내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교회가 있다. 일요일이면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끌고 온 차들 때문에 주변 도로의 교통 상황은 엉망이 된다. 도로 양쪽에 모두 불법주차를 하는 바람에 상당한 거리의 차도가 극심하게 좁혀져서 오가는 데에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교회에 나와 모두 이웃 사랑에 관한 설교를 듣고 결심하고 다짐하는 일을 하느라 이웃에 큰 폐를 끼친다. 이웃을 사랑하는 그 다짐과 이웃에 폐를 끼치는 일 사이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는가.

    제대로 사는 일. 힘들고 불편하다. 쓰레기 함부로 버리는 일을 비판하기는 쉽고, 자신이 직접 그것들을 줍는 일은 힘들다. 이웃은 아랑곳하지 않고 편리를 위해 차를 끌고 오는 것은 쉽고, 이웃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걷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오면 불편하다.

    이웃 사랑을 말하기는 쉽다. 그것을 실천하려면 반드시 일정 분량의 불편과 노고를 감당해야 한다. 일회용 물건을 쓰기는 쉽고, 그것들을 안 쓰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컵을 가지고 다니는 등의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기능적인 일은 쉽다.

    사람의 본바탕이 작동하는 일은 어렵고 불편하다. 대답은 기능적 활동이고 질문은 그 사람에게만 있는 내면의 호기심이 발동하는 일이라 인격적 활동에 속한다. 당연히 질문은 어렵고 대답은 쉽다. ‘따라 하기’는 쉽고 창의가 어려운 이치다. 우리는 쉬운 쪽으로 쉽게 기울게 되어 있어 질적인 상승이 더디다. 그래서 제대로 사는 일은 언제나 어렵기만 하다.

    간단히 정리하면, 인간으로서 제대로 사는 일은 스스로 불편을 자초하는 일과 같기도 하다. 불편의 최고 단계인 ‘장애’의 지경으로까지 끌고 가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다양한 수행의 모든 과정은 사실 ‘불편’한 것들로 짜여 있다. ‘장애’를 내면화하여 그것과 일치되는 경험을 유도한다. 불편과 장애와 한 몸이 되는 단계에서 인간의 본바탕이 구출되곤 한다. 편하고 자극적인 기능에 갇히지 않고 ‘장애’의 상태를 자초하면서 성숙은 시작된다.

    아주 오래전 중국 노(魯)나라에 형벌을 받아 발 하나를 잘린 왕태(王)라는 사람이 있었다. 덕망이 높아서 따르는 제자가 공자만큼이나 많을 정도였다.

    공자의 제자 가운데 한 명인 상계(常季)가 공자에게 묻는다. “왕태는 외발이 장애인입니다. 그런데도 따르는 제자 수가 선생님만큼이나 많습니다. 그는 가르치는 것도 없고 토론도 하지 않는데, 빈 마음으로 찾아갔다가 무언가를 가득 얻고 돌아간다고들 합니다. 그는 과연 어떤 사람입니까?”

    공자가 답한다. “그분은 성인이시다. 나도 찾아뵈려 했지만 꾸물대다가 아직 뵙지 못했을 뿐이다. 나도 그분을 스승으로 삼으려 하는데, 나만 못한 사람들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느냐. 노나라 사람뿐이 아니라 온 천하 사람들을 다 데리고 가서 그를 따르려 한다.”

    장애인인데도 모두 그를 따르려 한다면 도대체 그 사람은 어떤 마음가짐을 가진 것인지를 상계가 묻자 공자는 ‘근본’을 지키고 있다고 말해준다. 왕태는 자신의 지혜로 자신의 본마음을 터득한 것이다.

    이에 상계가 또 묻는다. “자신의 지혜로 자신의 본마음을 터득했을 뿐인데 왜 모든 사람들이 그를 따르는지요?”

    그러자 공자가 답한다. “사람은 흐르는 물을 거울삼지 않고 잔잔하게 가라앉은 물을 거울삼는다. 올바른 본심은 뭇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장자·덕충부』)

    도가에서는 이런 본마음, 즉 존재의 근본 상태를 ‘덕’(德)이라고 표현한다. 덕이 있는 사람은 타인을 압도하는 힘을 갖는다. 타인들은 이 사람을 추종하고 싶어 한다. 중후함이 경박함을 흡수하는 이치다.

    기능적인 활동에 갇힌 사람은 편한 것을 추구하며 가벼운 잡담과 비교 욕망에 빠져서 자신의 본바탕을 놓치고 가볍게 흔들린다. 하이데거는 이런 상태를 “존재자에게서 존재가 빠져 달아나버렸다”고 말한다. 가벼운 기능과 비교와 잡담에 빠져 인간으로서 가져야 하는 성스러운 어떤 본바탕을 상실하였다고 비판한 것이다. ‘장애’의 상태를 자초하여 불편을 감수하면서 ‘덕’이라고 불리는 본바탕을 지키는 것이 자신을 키우는 일이다.

    이 ‘덕’의 유지가 바로 인간을 기능적 활동에서 벗어나 본래적인 인간으로 서게 만든다. 기차 안에서도 전화가 오면 전화를 받는 기능에 빠지지 않고 인간으로서 품격을 유지하기 위해 통로로 걸어 나가는 불편을 감수한다. 교회에 갈 때 이웃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차를 몰고 가지 않는 불편을 스스로 받아들인다. 아는 것에 매몰되지 않고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고 불편한 몸부림을 친다.

    이렇게 하면 자신의 질량이 커지고 또 커져서 다른 가벼운 것들을 제압하는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매력이고, 존경을 유발하는 요소다. 장애인 왕태가 존경을 받고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린 이유다.

    또 아주 오래 전 중국 고대의 위(衛)나라에 애태타(哀)라는 추남이 살고 있었다. 그와 함께 지낸 남자들은 그 곁에서 떠나지 않으려 하고, 그를 본 여자들은 다른 이의 아내가 되느니 차라리 그의 첩이 되겠다고 한다.

    그는 자기 의견을 내세우지도 않고 늘 다른 이에게 동조할 뿐이었다. 군주의 자리에 있어서 죽음의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해준 것도 아니고, 쌓아둔 재산으로 남의 배를 채워준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 흉한 몰골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다. 지식도 사방 먼 곳까지 미칠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도 많은 남녀가 그를 따르려 모여드는 까닭은 무엇인가?

    장자는 이것을 온전한 덕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드러나게 하지 않는[德不形] 깊은 내공 때문이라고 한다.(『장자·덕충부』) ‘덕’을 갖추고 있음에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비유하여 말하면 물이 잔잔하게 멈추어 수평을 이룬 상태다. 안에 깊은 고요를 간직하고 출렁이지 않는다. 덕이 출렁출렁하게 드러나지 않을 정도가 되면 사람들은 거기에 이끌려 떨어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외적으로 출렁이는 모습은 기능에 갇혀 경박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말한다. 쓰레기를 버린다는 비판을 하면서도 자신 역시 버리는 이중적 가벼움 같은 것이다. 아는 것을 지키기만 하지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는 지적 부지런함을 발휘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눈앞의 편리함을 위해 공공의 책임감을 포기하거나 불편을 감수하지 않으려는 경박함이다. 이런 경박함을 버리고 불편함을 감당하며 인간으로서 품격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자가 덕이 있는 자다. 여기서 매력과 존경이 생길 뿐 아니라 비범하고 특별하며 위대한 일들도 덩달아 일어난다.

    하이데거의 “존재자에게서 존재가 빠져 달아나버렸다”는 문장에서 ‘존재’는 바로 존재자의 고향이자 ‘덕’이 활동하는 곳이다. 가볍고 번잡한 기능들을 지배하는 힘을 가진 비밀스런 곳이자 일상 속의 다양한 이중성 속에서 인간으로서 더 나은 선택을 하는 힘이 드러나는 곳이다. 창의적이고 비범하며 특별한 일들이 시작되는 곳이다. 그래서 ‘존재’, 즉 ‘덕’의 활동은 성스러운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사는 사람을 우리는 인간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자, 즉 ‘성인’(聖人)이라고 부른다.

    왕태나 애태타는 존재자에게서 존재가 빠져 달아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잘 지킨 사람들이다. ‘불편’, 심지어는 ‘장애’적 상황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감수한 사람들이다.

    경박하지 않고 성스러운 삶은 스스로 ‘불편’과 ‘장애’를 자초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다. 시민으로 사는 일도 마찬가지다. 불편을 자초하며 경박함을 벗어나려고 해야 비로소 가능하다. 그것을 우리는 시민의식이라 하지만, 사실은 인간으로서의 성스러움을 지키려는 태도다. 성스러운 삶은 불편을 감수하거나 자초한다.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건명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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