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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17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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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지방신문협회 공동기획] 최진석의 老莊的(노장적) 생각

더 좋은 세상을 위해 필요한 것은 정치의 발전
무정한 세월은 전혀 다른 환경을 향해 질주한다

  • 기사입력 : 2017-02-01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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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필용 作 ‘역사는 흐른다’


    성공한 사람의 발목을 잡는 가장 큰 적은 무엇일까? 한 번 성공을 해 본 사람이라면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또 다른 성공을 이루고 싶어 할 텐데, 그것을 못하도록 하는 가장 센 요인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성공 기억’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한 번 강력한 성공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대개 성공할 때 사용하였던 그 방법과 섬광 같았던 결정의 순간을 짜릿한 신화의 중심 줄기로 붙잡게 된다. 하지만, 그 신화의 줄기가 다시 자라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세월이 그리도 무정하기 때문이다. 세월은 원래 있던 환경을 지우고 전혀 다른 환경을 세워가며 질주해 나간다. 이 동작은 한 번도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성공할 때 발을 딛고 있던 그 상황과 조건은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 한 번 더 성공을 꿈꾸는 그 사람이 마주해야 할 상황은 언제나 새롭고 처음 직면하는 것이다. 이러한데도 ‘성공 기억’에 갇힌 사람은 새롭게 나타나는 조건마저도 과거에 했던 그 성공의 기억으로 다루려 한다. 움직이는 세상을 자신의 기억 속에 가두려는 무모한 시도와 다르지 않다.

    한 번 더 큰 성취를 이루고 싶다면, 우선 그 짜릿한 기억에서 벗어나야 하리라. 기억은 과거이고, 한 번 더 해야 할 성공의 결정적 순간은 이미 과거를 벗어난 환경 앞에 있다. 문제는 이 새로운 조건 앞에서 어떻게 새로운 결정을 새로운 방식으로 할 수 있는가이다. 노자는 말한다. “공이 이루어지면, 그 공을 차고앉지 말아야 한다(功成而不居).” 공을 차고앉았다는 말은 바로 성공 기억에 갇혔다는 뜻이다.

    노자는 처음에 이 말을 정치적인 의미에서 주로 사용하였다. 정치인이 지속적인 지배력을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백성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남는 생명력 있는 권위는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 우선 자기가 이룬 공, 바로 그것에 함몰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이룰 때 사용하였던 방법에 고착되어서는 안 된다. 에리히 프롬은 말한 적이 있다. 어떤 혁명가가 자신이 타도하려고 하는 대상을 타도하고 나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면 그것은 이미 혁명가가 아니라 반항아에 불과하다고….

    왜 진실한 표정을 지은 채 혁명가로 자처하며 목숨을 불사하던 헌신적인 사람들이 혁명을 이룬 후에는 쉽게 비판받고 버림받는가. 그것은 혁명 대상을 타도하고 나서 그 자리를 차고앉으려 시도하면서 이미 자신이 타도하려던 그 대상과 부지불식간에 닮아 버리기 때문이다. 정치 자체를 상승시키지 못하고, 정권만 교체한 형국이다. 혁명의 기운이 감돌 때, 백성들이나 국민들이나 시민들은 모두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꿈꾼다. 다른 세상은 다른 정치로만 가능하다. 혁명가들은 대개 다른 정치를 제공하겠다고 선동하지만, 결국 타도 대상이 앉았던 자리에 자신이 앉음으로써 다른 정치의 길은 요원해져 버린다. 정치가 상승하는 길은 사라지고, 권력만 교체된다. 이 정권이 저 정권으로 바뀐 것에 불과하다. 더 좋은 세상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정치의 발전이지 정권이나 권력의 교체가 아니다.

    당연히 혁명이라는 공을 이룬 후에는 그것을 차고앉으면 안 된다. 왜 아직도 현대의 유일한 혁명가로 체 게바라를 드는지 알 수 있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체 게바라는 쿠바를 혁명시키고 나서 쿠바의 권좌에 눌러앉지 않았다. 바로 다음 혁명지인 볼리비아를 향해 떠났을 뿐이다. 체 게바라에게는 혁명만 있었지 권력이라는 의자에 앉으려는 정주(定住)의 욕구가 없었다. 그래서 혁명을 또 혁명하며 비로소 유일한 혁명가로 남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 주위에서 들리는 익숙한 혁명가의 이름들은 사실 반항아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사회가 진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은 혁명가가 아니라 반항아가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반증이다. 지금의 대한민국 현실에서도 정권 교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서는 권력의 교체는 있을지 몰라도 정치의 상승을 기대하기란 어려울지도 모른다.

    이런 반항아들은 스스로를 혁명가라 자처하고, 자신들이 했던 반항의 활동을 혁명적이었던 것으로 포장한다. 진실한 혁명가는 스스로를 혁명가(革命家)라고 말하지 않는다. 부단한 혁명만 있기 때문에 자기를 어떤 집안(家)에 앉혀 둘 수 없기 때문이다. 특정한 집안(家)의 의자에 앉아 혁명을 말하려 하는 순간 그는 바로 반항아로 전락하지 않을 수 없다. 반항아들은 모두 무엇인가를 타도하고 난 후, 바로 그 자리를 차고앉아 바로 정주(定住) 형태의 집안(家)을 이루어버린다. 혁명이 성공한 그 순간을 차고앉는다. 혁명의 기억에 갇힌다. 이렇게 하여 앞으로 일어나는 어떤 일들도 이 혁명의 기억을 가지고만 재단한다. 그 기억에 맞으면 선이고, 그 기억에 맞지 않으면 반동이다. 혁명의 ‘깃발’이 바로 ‘완장’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모든 혁명의 과실은 역사 속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조작된 기억으로 담장을 친 이 집안으로 흘러 들어가 버린다. 어쩔 도리가 없이 혁명의 동네는 이 집안의 지배를 받는다. 역사가 더 흐르고 싶어도, 동네가 더 진보하고 싶어도, 혁명을 지속하고 싶어도, 혁명 시기 쌓인 증오를 벗어버리고 싶어도, 화해하고 싶어도, 다른 새 세상을 만들어보고 싶어도, 혁명의 그 기억에 갇힌 집안에 발목이 잡혀 있는 한, 한 발짝도 떼지 못한다. 혁명이란 지속적으로 혁명 될 때에만 혁명이 된다. 권력의 교체에 머무르지 않고, 정치의 상승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진보적 혁명도 결국은 보수화되고, 혁명가들은 또 다른 권력자로 남을 뿐이다. 그래서 공이 이루어지고 난 후에는 그것을 차고앉지 말자고 말하는 것이다.

    혁명의 기억에 갇히지 않음으로써 정치 발전을 이루고 새 세상을 펼친 예로는 중국의 유방(劉邦)을 들 수 있겠다. 유방은 항우와의 치열한 전투를 거쳐 승리자가 된 후, 한(漢)이라는 이름을 단 새로운 정치 마당을 펼친다. 황제가 되어 새 정치를 펼치고 있는 유방에게 육고(陸賈)라는 신하가 말한다. “황제께서는 이제 경전을 공부하십시오.” 여기서 경전은 철학이나 문학 혹은 역사 등 경세의 근본에 관한 학문을 가리킨다. 그러자 유방이 화를 내면서 말한다. “나는 경전 공부 없이도 말 잔등에 올라탄 채 천하를 차지하였다. 이런 경전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러자 육고가 차분한 어조로 대들며 재차 주장한다. “말 잔등에 올라탄 채로 천하를 차지했다고 해서, 말 잔등에 올라탄 채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유방의 위대한 점은 육고의 이 충고를 그 즉시 알아들었다는 데에 있다. 육고의 지도 아래 유방은 바로 경전 공부에 들어가는데, 이런 경청(傾聽)의 능력으로 유방은 천하를 차지할 때의 기억에 갇히지 않을 수 있었다. 만약 혁명의 그 기세와 기억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유방도 분명히 말 잔등에 올라탄 형상으로 국가를 다스리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방은 공이 이루어질 때의 그 기억에 갇히지 않고 바로 변신을 감행하였다. 혁명가에서 국가 경영자로 변신함으로써 오히려 혁명을 완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통치자들은 모두 권력을 잡는 데까지는 성공하지만, 결국 권력을 잡을 때의 그 기억에 갇혀 국가 경영자로 변신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정치인에서 국가 경영자로 진화하지 못한 것이다. 바로 공이 이루어지고 난 다음에 그것을 꿰차고 앉은 결과다.

    통치자들이 연이어 정치인에서 국가 경영자로 변신하는 데에 실패하면, 나라의 진보나 진화는 어느 단계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신생 독립국으로 출발한 지 70년 만에 한계에 갇혀 긴 시간 새로운 출로를 찾지 못함으로써 탄력을 상실하고 낡아버렸다. 한계에 갇혀 늙어버린 형편의 내용은 무엇인가. 공을 이룬 후에 그것을 꿰차고 앉은 결과다. 늙었다는 평가를 받기 전까지의 우리는 세계가 주목할 만한 직선적 발전을 구가하였다. 바로 해방 후 건국, 건국 다음의 산업화, 산업화 다음에 민주화를 시대적 요구에 맞춰 잘 해낸 것이다. 건국·산업화·민주화의 직선적 역사발전은 국가에 효율을 가져다주어 사회 각 부문이 모두 탄성 있고 탄력 있었다. 풍모가 젊고 싱싱하여 도전적이었다. 그러나 민주화까지 내달리고 난 다음에 우리는 그 다음의 목표를 설정하지 못하고 있다. 다음 목표가 설정되어야만, 그 목표를 새로운 사명으로 삼아 나아가면서 이미 이룬 공을 꿰차고 앉는 퇴행적 탐욕을 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 다음의 새로운 목표가 서지 않고 있으니, 민주화 세력은 민주화의 공을 꿰차고 앉아 있고, 산업화 세력은 산업화의 공을 꿰차고 앉아 있으며, 심지어는 건국 세력까지도 건국의 공을 꿰차고 앉아 있다. 꿰차고 앉아서 자신이 세운 공(功)이 진리라고 주장하며 싸우는 모습이 지금 우리의 민낯이다. 화려했던 그 성공의 기억을 붙들고 해왔던 얘기를 계속 해대며 자신의 입장을 권력화하려고만 한다. 그러나 정권이나 세력에 묻지 않고 역사에게 묻는다면,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이제 건국 세력도 과거이고, 산업화 세력도 과거이며, 민주화 세력도 과거이다. 각 세력 집단들은 우선 자신이 벌써 과거가 되었음을 인식해야 한다. 과거가 되었음을 인식해야만, 자신의 공을 꿰차고 앉지 않을 각성이 가능하고, 이 각성이 있어야만 새로운 탄력과 탄성이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새 정치라 하고, 새 역사라 하는 것이다. 과거가 미래의 발목을 잡으면 안 된다.

    “공이 이루어져도 그것을 차고앉지 않는 일(功成而不居)”은 노자 철학의 핵심인 ‘무위’(無爲)의 한 형태이다. 노자에 의하면, ‘무위’로만 위대함을 이룰 수 있다. ‘무위’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無不爲).’ 독일의 문호 괴테는 스스로를 뱀과 같은 존재로 생각했다. 허물을 벗고 항상 새로운 시작을 시도한다는 뜻이다. 괴테만큼의 성취를 이루고 간 사람이 몇이나 될까. 괴테의 성취는 부단한 허물벗기의 결과다. 허물을 벗는 뱀은 살고 허물을 벗지 못하는 뱀은 마침내 죽을 수밖에 없다. 공(功)이라는 허물에 갇히면 안 된다.


    ◇ 최진석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 건명원 인문학 운영위원

    -서강대학교 대학원 동양철학 석사, 베이징대학교 대학원 도가철학 박사

    -저서 ‘나는 누구인가’,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 송필용

    -전남대 미술교육과, 홍익대 대학원 서양화과 졸업

    -서울 학고재갤러리, 이화익갤러리 등 개인전 20회

    -1996년 제2회 광주미술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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