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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17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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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지방신문협회 공동기획] 최진석의 老莊的(노장적) 생각

역사의 진보는 필부들의 몫이다

  • 기사입력 : 2017-01-02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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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필용 作 ‘촛불’ oil on canvas 41x31.8㎝


    중국에 명나라 말엽부터 청나라 초기까지 활동한 고염무(顧炎武)라는 사상가가 있다. 명나라의 멸망과 청나라의 건립을 목도한 그는 『일지록』(日知錄)이라는 책에 세상사 흥망에 관한 글을 남기는데, 나중에 양계초(梁啓超)가 그것을 “천하흥망 필부유책”(天下興亡 匹夫有責)이라는 여덟 글자로 개괄하였다. 뜻인즉슨, 천하의 흥망은 필부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여덟 글자에서는 흥하고 망하는 일을 한꺼번에 말하고 있지만, 개괄되기 이전의 전체 문장을 보면 주로 망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고염무는 나라가 망하는 것과 천하가 망하는 것을 구분하여 말한다. 그것을 우리 사정에 맞춰 이해하면 정권이 망하는 것과 나라가 망하는 것을 구분한 것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그에 의하면, 정권이 망하는 것은 그 정권을 맡았던 엘리트들의 책임이지만, 나라 전체가 흔들린다면 이는 보통 사람들 모두의 책임이다.

    정권이 망하는 것과 나라가 흔들리는 것은 다르다. 정권은 나라 안에서 통치권만 장악하는 집단이므로, 그 정권이 흔들린다고 해서 나라 전체가 흔들리는 일은 없다. 오히려 정권이 바뀌는 과정을 거치면서 나라는 역동적인 생태 환경을 유지할 수 있다. 다수의 필부들에게 선택받지 못한 정권을 망한 정권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이 경우에는 분명히 그 정권을 지탱하던 정치 엘리트들만 책임지고 물러난다. 그러나 나라가 흔들리는 일은 심각하다. 고염무도 글에서 말했듯이 나라가 망한다는 것은 그 나라를 받치고 있던 공통의 가치관이나 법질서가 믿음을 상실하고 흔들리는 일이다. 구성원 일부가 동요하는 경우와는 다르다. 구성원 전체가 중심을 잡기 어려워하며 비틀거린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박근혜 국정농단 사태는 바로 구성원 전체가 동요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가치관이나 법질서가 중심을 잃었다는 점에서 나라가 흔들리는 정도의 큰일이다.

    나라가 흔들리는 경우를 당하여 분노한 필부들은 촛불을 든 채 광장으로 모여든다. 그 분노는 썩은 최고 권부를 향해 있다. 썩어빠진 권부를 향해 정의의 분노를 발산하는 필부들에게 “당신들 모두에게 책임이 있어!”라고 고염무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정의로운 이 필부들에게는 얼마나 황당한 말인가. 열심히 산 죄밖에 없는 필부들이 기득권 상층부의 부패로 흔들리는 나라의 운명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니 황당하지 않겠는가. 부패하고 무능한 기득권층을 어떻게든 잘라버리고, 당장 위로를 받아도 시원찮은데 말이다.

    여기서 마음을 내려놓고 차분히 앉는다.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에게서 들었던 얘기를 기억해본다. “정치는 그 사회의 얼굴이다.” 정치의 수준은 그 사회의 수준을 그대로 반영한다. 듣기 싫어도 이것은 사실이다. 청와대에서 ‘박근혜-최순실’이 벌였던 한심한 일들이 규모나 깊이는 다를지 몰라도 필부들의 세상에서 유사하게 벌어지고 있지는 않을까? 필부들까지 내려오지 않더라도 지금 정치적 공격권을 가지고 있는 야당에서는 이런 유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지 않을까? 장담하기 어렵다. 박근혜 국정농단의 핵심은 국민이 마련해준 국가의 공적 시스템을 사용하지 않고, 사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권위를 주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오히려 국가 시스템을 임의적으로 사용하게 함으로써 국기(國紀)를 문란하게 한 것이다. 핵심은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사적인 관계로 공적인 구조를 무력화시켜 버린 것이다. 우리 정치권에서는 내내 당을 사적으로 운용하는 것이 큰 문제가 되어 왔다. 그래서 항상 사당화(私黨化)라는 비판을 주고받는 것이다. 당의 공적 의사 결정이 왕왕 대표자 주위의 몇몇 사적인 인사들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역대 대통령들은 모두 권력을 사적인 맥락에서 운용한 것으로 호된 홍역을 치르곤 했다. 권력을 사적으로 사용한 적이 없는 대통령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보다 더 밑으로 내려와 보자. 최순실의 딸 정유라의 성적 조작과 같은 일들이 이화여대 외에는 정말 없을까? 그렇지 않다. 최근 광주의 S 여고에서는 수시를 통한 대입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특정 학생들의 생활기록부를 임의로 수정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다른 학생들이 받지 못한 면접 관련 도움을 특정 학생은 여러 번 받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일이 그 학교에서만 일어났겠는가. 부산의 K 방송국에서는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하루아침에 임기가 아직 많이 남은 사장을 전격 교체해버리고, 전 사장이 했던 사업들을 모두 축소하거나 취소해버렸다. 정책의 일관성보다도 소유자의 입맛대로 하루아침에 사람을 교체해버리는 일은 어디서나 어렵지 않게 목격된다. 문체부 국장이 대통령 맘에 들지 않는다고 졸지에 쫓겨나는 일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 방송국 소유주하고 박근혜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신분의 높낮이 외에 차이가 없다. 그렇다고 이런 일이 그 방송국에서만 일어났겠는가.

    고염무가 볼 때, 나라 자체가 흔들리는 일은 단순한 정치적 사건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그런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도록 이미 조성되어 있는 나라 전체의 문화에 이유가 있다. 정치적인 개별 사건에 의해서는 겨우 정권이 바뀔 뿐이다. 그런데 어떤 사건이 나라의 틀을 흔들 정도라면 이는 이미 전체적인 문화적 행태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화 구조에는 모든 필부들이 참여하고 있다. ‘박근혜-최순실’ 국정 농단의 유형이 사회 어디서도 일어나지 않고, 오직 청와대에서만 벌어진 사건이었다면 문제는 오히려 간단하다. 문제가 엄중한 이유는 필부들이 살고 있는 사회 도처 어디서나 이런 유형의 일들이 언제나 목도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고염무는 나라가 흔들리는 일에 대해서 필부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다. 그럼 분노에 빠진 이 필부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답한 일이다.

    『장자』의 ‘인간세’편 첫 대목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제자 안회가 스승인 공자를 찾아와 국권을 남용하며 난폭한 정치를 하는 독재자 때문에 도탄에 빠져 허덕이는 위(衛) 나라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그곳으로 가겠다고 한다. 그러자 공자가 말한다. “너는 거기에 가 봤자 처벌이나 받고 말겠다. 원래 그런 일을 할 정도의 훌륭한 사람이라면 자기에게 먼저 도(道)를 갖추고 나서 남도 갖추게 한다. 너는 갖추고 있어야 할 것을 갖추지 못하여 아직 불안정한데, 어찌 가능하겠느냐?” 그러자 안회는 자신이 그 일을 하려고 얼마나 높은 경지까지 수양을 했는지 구구절절 이야기하며 스승을 설득하려 애쓴다. 그러자 스승이 한마디 한다. “그래 가지고 어떻게 상대방을 감화시킬 수 있겠느냐? 너는 아직도 자기 생각에 갇혀 있다.” 안회는 갈수록 더 이해가 안 되었다. 결국 자신은 도저히 어찌해야 가능한지를 알 수 없으니 방법을 알려달라고 간청한다. 그러자 스승이 말한다. “심재(心齋)하라!” 이 말을 그대로 풀면 마음을 재계하라는 뜻이다. 자기 마음에 출입문을 세우지 말고, 보루도 쌓지 말며, 오직 자신 본바탕의 음성을 듣도록 자신을 준비시키라는 말이다.

    스승은 심재의 방법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준다. “잡념을 없애고 마음을 통일하라.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듣도록 하고,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氣)로 듣도록 하라. 귀는 소리를 들을 뿐이고 마음은 밖에서 들어온 것에 맞추어 깨달을 뿐이지만, 기란 공허하여 무엇이나 다 받아들인다. 그리고 참된 도는 오직 공허한 상태에서만 모인다. 이 공허의 상태가 바로 심재이다.” 귀로 듣는 일, 마음으로 듣는 일 등에는 아직 제한적인 자기 관점이 강하게 적용되는 단계이다. ‘기’(氣)의 단계는 아직 이념이나 가치가 개입되기 이전으로서 세계의 가장 원초적 상태이다. 어떤 가치나 관념이 자리 잡기 이전 혹은 자기만의 생각에 갇히지 않은 단계이다. 이 단계에 도달해야만 순수 절정으로서의 자신으로 존재하게 되어 감화력을 갖는다.

    자기만의 생각에 갇혀 있는 사람이 하는 정의로운 활동은 대개 자기만의 생각에 갇혀 있는 또 다른 정의로운 사람과의 충돌일 뿐이다. 그러니 충돌만 존재하고 감화력은 생기지 않는다. 그러면 충돌에서 설령 이기더라도 정치적 승리로 그치고 만다. 정치적 승패는 상황을 같은 층위에서 반복하거나 뱅뱅 돌게 만든다. 승패의 교환만 계속되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 자체는 발전하지 않고 순환만 한다. 심재하여 자신 만의 생각에 갇히지 않게 되어 감화력이 발동하면 우리는 정치적 승리에 그치지 않고, 문화적 승리로 나아갈 수 있다. 필부 한 사람 한 사람이 심재하여 달라진다면, 필부들의 삶 자체에 진보적 방향성을 심어줄 수 있는데, 필부들의 삶이 이루는 구조와 방향성을 우리는 문화라고 하지 않는가. 필부들이 삶을 꾸리는 일상의 현장에서 작은 ‘박근혜-최순실’들이 사라져야, 청와대의 ‘박근혜-최순실’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형태의 ‘박근혜-최순실’이 또 등장할 수밖에 없다. 필부들이 채우는 삶의 현장이 바로 그 나라의 문화이고, 한 나라는 그 문화적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분명하다. 답은 필부들이 활동하는 일상의 공간에 있다. 일상의 정의가 나라의 정의를 결정하는 것이다.

    필부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문화에 책임을 묻는 것과 같다. 문화를 구성하는 필부가 심재하는 것은 또 폐쇄적인 생각에 갇히지 않게 된다는 것과 같다. 심재한 필부는 폐쇄적 생각을 벗어났기 때문에 다른 폐쇄적 생각과 싸움을 벌이는 대신에 개방된 태도로 시대의 흐름과 접촉할 수 있다. 비로소 우리는 과거와 벌이는 투쟁을 통해 시대의식을 포착하여 미래를 기약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박근혜 국정농단’과 같은 퇴행적 사건과 투쟁하면서 잘못하면 덩달아 퇴행할 수 있다. 필부들의 각성이 특히 필요하다. 우리는 어쨌든 전진해야 하기 때문이다.


    ◇ 최진석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 건명원 인문학 운영위원

    -서강대학교 대학원 동양철학 석사, 베이징대학교 대학원 도가철학 박사

    -저서 ‘나는 누구인가’,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 송필용

    -전남대 미술교육과, 홍익대 대학원 서양화과 졸업

    -서울 학고재갤러리, 이화익갤러리 등 개인전 20회

    -1996년 제2회 광주미술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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