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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02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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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근로정신대를 아시나요 (상) 피해 할머니의 외로운 싸움

“늙은이들 다 죽기전에 사죄 받아내야지”

  • 기사입력 : 2011-02-28 09: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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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숙자할머니(가명)가 정부로부터 받는 연 80만원의 지원금 통장을 살펴보고 있다.

    해방 후 66년, 돌아오는 3월 1일은 92번째 맞는 3·1절이다.

    일제강점기, 우리민족은 조국을 잃은 슬픔에 더해, 전쟁 속에 강제동원돼 목숨과 인권을 유린당하고 노동력을 착취당해야만 했다. 긴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대일항쟁을 벌이고 있는 이들이 있다.

    3·1절을 맞아 강제동원피해자 가운데 비교적 사회의 관심을 덜 받아온 근로정신대 피해자의 생생한 증언을 들어보고, 사회적 관심과 지원의 필요성을 짚어보고기 위해 관련 인터뷰, 세미나, 현황 및 대책에 대해 3회에 걸쳐 싣는다.

    1944년 마산시 반월동 성호국민학교. 당시 6학년이었던 숙자는 친구와 함께 운동장 한 켠에서 장난을 치며 놀고 있었다. 그때 2명의 일본군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학교로 들어왔다. 웬 낯선 사람인가 궁금해하던 중 수업종이 쳤다.

    교실로 들어가자 일본인 여선생이 숙자를 비롯해 학생들을 강당에 모아놓고 활동사진을 보여줬다. 활동사진은 국방색 작업복을 입은 숙자 또래 여학생들이 쇠를 깎거나 꽃꽂이를 하는 영상물이었다.

    활동사진을 보고 나자 일본인 여선생이 귀가 솔깃해지는 얘기를 꺼냈다. 일본에 가면 돈도 벌 수 있고, 여학교에 진학도 시켜준다는 것이다. 앞날이 밝지 않은 일제강점기, 어린 나이에 취업과 진학을 동시에 할 수 있다는 말은 달콤하게 들렸고 숙자는 일본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올해 나이 82세. 70년 전 이야기를 마치 어제 같이 기억하는 김숙자 할머니(82·창원시 마산합포구 반월동).

    아버지를 속이고, 어머니 가슴에 멍을 들이고 일본으로 향하는 배에 오르니 성호국민학교 여학생 5명을 비롯, 여성 50명이 타고 있었다.

    마산항을 떠나 부산, 시모노세키항을 거쳐 후지코시 군수공장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생활은 일본인 여선생의 말과는 180도 달랐다.

    철망으로 둘러싸인 기숙사와 공장을 오가며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했다. 감시받는 기숙사 생활에다 공장에서는 종일 노동에 시달렸다. 키가 작아 손이 닿지 않으면 발판을 딛고 서서 일해야 했고, 기계에 뿌리는 기름을 입으로 빨아올리다 기름을 삼키기도 부지기수였다.

    무엇보다 참기 힘들었던 것은 추위와 배고픔이었다.

    “식판에는 밥, 국, 다꽝(단무지) 밖에 없었어. 점심으로 나오는 삼각빵도 아침 나절에 다 먹어버렸지. 배가 고프니깐. 점심 때는 공장 옆 들판에 가서 땅을 파서 무 같은 것을 흙만 대충 털어내고 씹어 먹었는데, 탈도 많이 났어. 냉골바닥에 내 이불, 친구 이불을 두개 깔고 누워서 꼭 껴안고 자는데, 냉기가 올라와서 1~2시간 만에 깨는 거야. 친구랑 밤에 부둥켜 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1년 3개월이 흐른 후, 공장을 황해도로 옮기게 됐다며 근로정신대 여성들과 함께 황해도로 보내졌다. 황해도에서 뜻밖의 휴가를 주며 강제 귀향시켰고 집에 도착하자 곧바로 해방이 됐다.

    해방도 되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기뻐할 수 없었다.

    부친은 막내딸을 그리워하다 세상을 떴고, 혹독한 노동의 대가도 지급받지 못했다.

    “계약기간인 2년이 되면 돈이 든 통장과 함께 집에 보내준다고 해서 그말을 믿었지. 그런데 그렇게 집에 돌아오니 돈 구경은 해보지고 못했어.”

    귀국 후 그는 집 안에서 숨은 듯 살아야 했다. 괜한 오해를 받기 싫어서였다. 위안부가 손가락질 받던 시절, 사람들은 정신대와 근로정신대를 구분하지 못했고 그 때문에 근로정신대 여성이 곤욕을 치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김씨는 주변은 물론 가족에게도 근로정신대 생활을 숨긴 채 지난 세월을 살아왔다. 아직도 김씨의 가족은 그 사실을 모른다.

    지난 세월을 묻어두고 살던 김씨가 10여년 전부터 억울함을 풀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울, 부산, 일본을 오가며 후지코시를 상대로 싸움에 나선 것이다. 각지에 흩어져 있는 근로정신대 할머니들과 함께 연 1~2회씩 일본을 오가며 노동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창원에서는 이런 활동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전혀 없다. 여든 할머니의 싸움은 외로울 수밖에 없다.

    “우리 일을 도와주는 사람 1명만 있어도 좋겠어. 혼자 먼 길 왔다갔다 하는 게 너무나 힘들거든.”

    3년 전부터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등에관한특별법에 의거, 정부로부터 위로금 명목으로 연 80만원의 지원금을 받지만, 후지코시로부터 체불임금을 받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체불임금도 그렇지만, 김씨를 비롯한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이 바라는 것은 일본의 ‘진심 어린 사죄’다. 그리고 정부와 국민들의 인식 변화와 관심이다.

    “돈도 돈이지만, 더 늦기 전에 사죄를 받아내야지. 늙은이들 다 죽기 전에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김 할머니는 28일 오후 2시 창원대에서 열리는 ‘근로정신대의 올바른 이해를 위한 사례 발표회’에 참석해 이 같은 내용을 발표한다.

    ☞ 근로정신대= 태평양전쟁 말기 1944~1945년 전시에 노동력이 부족해진 일본이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배우자가 없는 여성을 중심으로 만든 조직. 주로 취업, 진학을 미끼로 모집된 여성들은 일본의 군수공장에 투입돼 노동력을 착취 당했다. 외부와 단절되고 추위와 배고픔 등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하면서도 제대로 임금을 받지 못한 채 해방 후 한국으로 송환됐다. 근로정신대는 노동력을 모으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지만, 위안부로 오해받지 않기 위해 근로정신대였다는 사실을 숨기고 살았다.

    글·사진=김희진기자 likesky7@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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