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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02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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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의 건축물 기행] 합천의 정자와 누각을 찾아서

자연스럽게… 자연을 담았다, 자연을 닮았다

  • 기사입력 : 2024-02-08 08: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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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항상 시간에 쫓기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현대인에게 휴식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다양한 방법으로 휴식을 즐기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연과 함께하는 휴식을 선택할 것이다. 자연을 바라보고 감상하기 좋은 장소에는 항상 빠지지 않는 건축물인 정자와 누각이 자리하고 있다. 비슷한 형태를 가졌지만 정자와 누각은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정자(亭子)의 한자 ‘亭’(정)은 ‘高’(고)와 ‘丁’(정)이 합쳐진 글자로 글 자체는 ‘높게 지어진 건축물’을 의미하지만 ‘사람이 편하게 머무를 곳’으로 풀이되기도 하고, 규모가 작고 사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 누각(樓閣)의 한자 ‘樓’(누)는 나무 ‘木’(목)과 겹칠 ‘婁’(루)가 합쳐진 글자로 중첩으로 지어진 ‘다락’을 뜻하지만, 비교적 정자보다는 규모가 크고 공적이면서도 격식이 높은 건축물을 의미한다.

    누각과 정자를 함께 일컫는 명칭으로 정루(亭樓)하고도 하는데, 규모나 형태, 용도 등에 따라 건물 이름에 ‘樓’(누)와 ‘亭’(정)이 조금씩 다르게 적용되고 있다. 전국적으로 정루(亭樓)가 가장 많은 곳은 경북지역이며 다음은 전남, 그리고 경남지역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 경남지역에는 대표적으로 함양 화림동 계곡의 정자들을 익숙하게 접하고 있지만, 각 지역별로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는 정루(亭樓)가 많이 있다. 그중에서도 빼어난 절경과 아름다운 자태를 가지고 있는 합천의 정자와 누각을 건축가의 접근 방식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황강 아래에 자리한 조선시대 정자 ‘호연정’
    용이 꿈틀대는 내부 형상… 빛나는 풍광은 덤

    처마의 빗물이 강물로 바로 떨어지는 ‘함벽루’
    황강·금빛 모래사장과 어우러져 자태 뽐내

    신라 문장가 고운 최치원이 머물렀던 ‘농산정’
    자연 거스르지 않게 규모 최소화하고 낮게 건축

    매봉산을 등에 지고 황강과 금빛 모래사장과 어우러져 운치를 더하고 있는 함벽루 전경./신대곤 건축사/
    매봉산을 등에 지고 황강과 금빛 모래사장과 어우러져 운치를 더하고 있는 함벽루 전경./신대곤 건축사/

    첫 번째로 합천군 율곡면 문림길에 있는 조선시대 정자 호연정을 찾아보았다.

    정자는 마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굽이쳐 흐르는 황강의 아래쪽 코너에 자리하고, 황금들판과 낮게 솟아오른 강둑언덕 앞부분에 위치하고 있어 강물이 내려오고 흘러가는 것을 함께 바라볼 수 있다. 주변에는 계곡의 물소리와 아름다운 풍경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고요한 들판과 느리게 흐르는 강줄기가 주변의 풍광이다.

    언덕 주변에 고목의 은행나무와 울창한 숲을 바라보며 가벼운 마음으로 대문을 들어갔다. 하지만 ‘호연정’을 접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는 평해 월송정에서 간성 청간정까지 관동팔경의 정자들을 찾아 여행도 하였고 전국의 많은 정자들을 찾아다녔지만 건축적으로 이렇게 아름다운 정자를 접해본 적이 없었다. 대부분 사람들이 기대감 없이 이곳에 왔다가 기쁜 마음으로 발걸음을 돌렸을 거라 생각해 보았다.

    황강의 아래쪽 코너에 자리한 호연정.
    황강의 아래쪽 코너에 자리한 호연정.

    ‘호연정’이라는 이름은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른다는 의미로 ‘맹자’의 공손추편(公孫丑篇)에 나오는 글에서 이름을 가져왔다고 한다. 호연지기의 의미는 ‘세상에서 꺼릴 것이 없고 남의 말에 흔들림 없는 모양새’를 뜻하는 것으로, 건물 내부의 나무들은 마치 용이 꿈틀대는 모양새로 자유롭고 자연 그대로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어쩌면 건물 이름과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황강의 풍경을 바라보는 정면과 측면, 두 면에는 아치형 보를 적용했는데 비슷한 모양을 적용하기 위해서 오랜 시간 동안 자재를 찾는 노력과 자연 그대로를 사용하려는 건축주의 노력과 의도가 엿보인다.

    특이하게 휘어진 나무는 용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거북 모양으로 용을 떠받치고 있는 형상이다. 대부분의 정자들은 아름다운 주변 경관이 먼저 보이고 건물이 자연 속에 스며들지만 ‘호연정’은 건물의 아름다움이 먼저 보이고 울창한 숲이 배경이 되는 듯한 건물이다.

    두 번째로 우리나라에서 처마의 빗물이 강물로 바로 떨어지는 유일한 누정인 함벽루이다. 남쪽에서 합천읍으로 진입하면 넓은 황강과 금빛 모래사장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강 건너편 매봉산을 등에 지고 자리하고 있다.

    함벽(涵碧)은 ‘푸른 빛으로 적신다’는 뜻으로, 물가에 인접하여 습기와 홍수 때문에 수차례 수리를 거듭하였는데 건물을 중수할 때마다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를 지키고자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합천 8경 중 5경으로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59호로 지정되었으며 이황, 조식, 송시열의 글들이 현판과 암벽 등에 많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오래전부터 많은 시인·묵객들이 풍류를 즐긴 장소임을 알 수 있게 한다.

    황강의 풍경을 바라보는 함벽루 우측.
    황강의 풍경을 바라보는 함벽루 우측.

    호연정은 정자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다소 인위적인 느낌이었다면 함벽루는 주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가장 잘 감상할 수 있는 위치에 배치되었다.

    하지만 현재는 함벽루 앞에 데크로 만든 산책길이 있어 군민들에게는 휴식처이지만 건물에서 느낄 수 있는 풍경이 감소되고 강으로 떨어지는 낙숫물의 운치를 느낄 수 없어 보인다. 누각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오직 그곳에서만 느낄 수 있기에 데크 설치에 대한 아쉬움이 남았다.

    세 번째는 신라말의 학자이며 문장가인 고운 최치원이 머물렀다는 농산정이다.

    해인사의 소리길을 따라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들으며 홍류동 계곡을 올라가다 보면 정자 하나가 소나무들 사이에 물소리에 묻혀 나타난다.

    ‘세상의 시비가 귀에 들릴까 저어하여, 짐짓 흐르는 물소리로 산을 다 막았네’라는 그의 자작시에서 연유한 농산정의 의미를 알 것 같다.

    홍류동 계곡을 올라가다 보면 나오는 농산정.
    홍류동 계곡을 올라가다 보면 나오는 농산정.

    홍류동계곡은 가을단풍이 너무 붉어 계곡물이 붉게 보인다고 해서 紅流(홍류)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건물의 장소성으로 볼 때 홍류동계곡에서 계곡으로부터 안전하며, 넓은 바위에 자연을 가까이할 수 있고, 평탄한 여유 공간이 있어 건물을 지을 수 있는 가장 적합한 곳이 이곳뿐이었으리라 짐작한다.

    건물의 건축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936년에 보수하였다고 하는데, 외부에 8개의 기둥이 있고 내부에 4개의 기둥이 추가되어 있다.

    구조적으로 내부기둥 4개는 전혀 필요가 없어 보이며, 자연을 감상하기에도 내부기둥이 적절해 보이지 않았는데 어떤 이유로 기둥을 추가했는지 궁금하였다.

    농산정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도록 그 규모를 최소화하고 가급적 낮게 건축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정자에서의 풍경이 압도적이지 않은 것은 깊은 계곡과 험한 산세에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정자와 누각은 하늘과 구름, 흐르는 물, 기암괴석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과 함께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 적혀 있는 편액의 의미와 현판의 역사를 통해서 그곳에서 자연을 바라보고 풍경을 감상했던 조상들의 감정들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곳에 있는 건물을 바라보는 자세는 얼마나 유명한 조상들이 다녀갔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자연을 즐기고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인공 구조물이 얼마나 자연과 닮은 모습인지, 어떻게 자연을 담아내고자 했는지를 생각하면서 여행을 떠나 보면 좋을 것이다.


    (이노디자인건축사사무소 신대곤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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