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16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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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과 떠나는 우리나라 여행] 서울 야경

도시가 만든 은하수를 보다

  • 기사입력 : 2018-03-28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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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에 지친 사람은 어디로 가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 없어지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오래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들 때, 봄기운이 다한 꽃잎은 손바닥 흔들 듯 빙글빙글 떠난다. 수명이 다한 일은 아무런 다스림도 없이 간다.

    2년이 지난, 더위가 무르익기 전의 늦은 봄, 여러 약속들이 잡혀 며칠 간 서울엘 다녀와야 했다. 마침 서울에 간 지도 오래돼 조금 일찍 올라가 이것저것 구경을 하려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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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산타워에서 바라본 서울의 야경.


    KTX를 탈까 하다가, 조금 느려도 우등버스를 타고 갔다. 도로를 타고 차들이 미끄러져 간다. 산을 지날 때는 곡선을, 강을 건널 때는 직선으로, 도로는 저만의 기예로 도시를 잇는다. 엔진은 소음을 내고 차체가 흔드는 박자에 익숙해질 무렵에는 소음도 드문드문 정적을 이룬다. 차가운 창에 얼굴을 대본다. 빠르게 지나가 형체를 분간하기 어려운 풍경은 사색을 돕는다. 풍경은 생각의 등을 밀고, 생각은 풍경을 다시 없을 풍경으로 빚어낸다. 풍경은 슬픈 이는 슬프게, 기쁜 이는 기쁘게 메아리 같은 기운이 있다. 풍경은 메아리로 사람의 감정을 받아치며 자기 내부를 짚어보게 만든다. 달리는 차안에서 묵묵히 밖을 보고 있으면, 지나간 후회와 다가올 기대가 끊임없이 진자운동을 하며 일상에 나를 얽매고 있던 것으로부터 깊숙이 고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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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산타워.


    여행은 자유를 찾는 버릇이 있다. 사람은 자신을 얽매는 모든 것으로부터 고립됐다고 생각들 때 비로소 자유롭다.

    터미널은 문턱처럼 도시의 입구가 된다. 버스가 서울터미널에 내릴 즈음 약속을 주선한 친구에게 곧 도착하니 모레 보자고 연락했다. 그런데 웬걸, 다음 주 보기로 한 거 아니냐는 답이 왔다. 아뿔싸. 날짜를 착각해 일주일이나 앞당겨 서울에 와버렸다. 어차피 일찍 와서 노닥거리기로 했으니 아무래도 좋았다.

    평소 서울을 가면 누나 집에서 숙박을 해결하지만 약간의 문제가 있어, 다소 허름하지만 친구 하숙집을 빌리기로 했다. 그런데 정작 주인인 친구는 한동안 고향에 내려와 있어 빈집에 혼자 일주일 넘게 살아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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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사평대로에서 본 남산타워.



    대학가의 하숙집이라 외부인의 출입이 염려됐지만 집주인을 찾아보기 힘들 만큼 독립적 공간이라 괜찮았다.

    그렇게 방 열쇠 하나만 달랑 들고, 명지대 인근의 친구 집을 살다 나오게 됐다. 벽돌 담장을 따라 들어간 하숙집은 전형적인 대학로의 원룸촌 중심에 위치했다.

    낯선 사람이 다가오면 길고양이들은 풍선 터지듯 움찔하며 달아나고, 길바닥에 코를 박고 잠든 어느 집인가의 개가 있는 동네였다. 하숙집 대문과 집 사이에는 양광을 듬뿍 받은 조그만 정원이 있었는데, 드문드문한 손질과 적당히 내버려둔 흔적이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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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머무른 서대문구 홍은동은 근처를 따라 걸으면 안산폭포가 나온다. 혼자 식당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매일 그곳을 산책 삼아 걸어 다녔다. 밤 폭포는 멀리서부터 소리로 그 윤곽을 잡게 한다.

    어떤 날은 어디로든 맘껏 헤매다 올 작정으로 방을 나섰다. 낯선 땅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지나가는 밖을 보는 것만으로도 여전히 여행 중이라는 사실이 체감돼 두근거린다. 가뜩이나 복잡한 서울 곳곳을 꽈배기처럼 배배 꼬며, 해방촌 서점들을 찾아다니고, 이곳저곳을 혼자 쏘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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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산타워 입구의 벚꽃.


    그렇게 늦게까지 놀다 들어가 잠을 잤다. 친구 방에서 혼자 자고 일어난 서울 아침의 햇볕은 맑고 바삭했다. 눈 비비며 곧바로 맥주 캔을 뜯어 잔에 부었다. 거품이 창살 사이 햇살에 반짝였다. 낯선 집에서 일어나 아침부터 혼자 맥주를 들이켜는 일. 가족들과 함께 사는 집에서도 딱히 금기시되는 일은 아니지만 괜스레 걱정과 시선을 받을까 봐 하지 못하고 미뤄온, 가벼운 소망이었다. 이날 아침은 갓 개어진 촛농같이 몽글몽글거려 오늘은 뭐든 잘될 것만 같은 감촉이 들었다.

    다시 누워 있으니 하숙집 복도의 슥슥 슬리퍼 끄는 소리가 낮달처럼 간지럽게 속닥거렸다. 돌이켜보니 그 순간이 공간에 정이 붙는 시간이었다. 돌아올 짐을 꾸릴 때는 어쩐지 이사하는 기분이 났다.

    다른 날은 의무경찰 시절 동기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눈을 뜨고 감을 때까지, 온종일 더불어 지내던 시절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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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제천 안산폭포.



    각각의 근황을 나누자 안주가 나왔다. 힘든 일과 좋은 일을 몇 번 주고받고, 서로의 형편을 다독이자 술병이 훌쩍훌쩍 비워졌다. 잔뜩 오른 취기에 사붓사붓 걸어 나와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또 다른 날은 회계사 공부를 하는 친구를 학원가 근처에서 만나 치킨을 먹으러 갔다. 어느 동네에나 있을 법한 치킨집에 갔다. 부부로 보이는 노년의 남녀가 좋아하는 부위를 사이좋게 교환해가며 나눠 먹는 모습에 마음이 넉넉해졌다. 나가면서 본 기억으로, 입가에 닭기름이 묻어 부부의 양볼이 반짝반짝 빛이 났었다.

    낮은 무너지기 전 자주색을 내다가 이윽고 먹을 풀듯 어둠이 스민다. 낮은 세상의 민낯을 드러내고 밤은 어둠이 있어 무엇이든 상상될 수 있다. 마지막 날 밤에는 남산타워를 올라가보았다. 밤의 색상은 낮보다 풍요롭다. 밤하늘의 별을 깊게 들여다보면 살구색, 분홍색 등으로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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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촌의 한 북카페.


    반 고흐는 짙은 남색 표면 위에 하얀 점을 찍어 놓는 것으로는 절대 밤을 표현할 수 없다고 그의 누이에게 싫증을 내곤 했다. 남산에서 내려다본 야경은 도시가 만든 은하수 같다. 서울의 야경은 멀리 있는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의 낯빛처럼 제각기 다르게 반짝인다. 여행자는 내부인은 느끼지 못할 무언가를 발견한다.

    드 메르스트는 ‘나의 침실 여행’이란 책을 썼다. 책은 여행자의 심리로 자신이 삶을 보내고 있는 방을 탐험한다. 침실 여행은 오래 살아온 재미없는 집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리고, 익숙한 사실에 대한 기대를 한껏 끌어올린다. 소파에서 침대를 관찰하고, 밤의 창가에 서서 야간비행을 한다. 따분한 집안을 적극적으로 의식하며 직접 감동을 생산한다. 견인당하듯 돌아갈 버스를 타고 내려오는 밤에는 비가 내렸다. 빗물 묻은 창문에 가로등 불빛이 맺혀 물방울 속에 별이 드나들었고, 심야버스 창문은 한 장의 야경 같았다. 드 메르스트는 이걸 보고 은하수를 여행했을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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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 성산대교.



    마산에 하차할 때는 뚝뚝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를 끝으로 비가 그쳤다. 서대문구 홍은동, 그 동네에는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내가 아는 사람 역시 아무도 없었다. 기거한 동안 한 번도 외롭지 않았고, 그 작은 방은 많은 걸 느끼고 나온 소중한 나의 여행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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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진백
    △ 마산 출생·경남대 재학
    △ 2015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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