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밀하고 정교하게 짜여진 각본. 그것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으레 현장검증이란 그런 법이다. 이번도 예외는 아니었다.
4일 오전 창원시 무학산 정상 인근에서 '무학산 등산객 살인사건' 현장 검증이 실시되고 있다. /전강용 기자/4일 정각 오전 9시, 범인 A(47)씨를 태운 법무부 차량이 원계마을로 들어섰다.
문이 열리고, 모자를 푹 눌러쓴 왜소한 체격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카메라를 든 기자들이 앞섰고 연이어 유족들이 돌진했다.
“X새끼야, 니가 뭔데 그런 착한 사람을 쥑이노!” “니는 밥이 넘어가고 잠이 오더나!” “살려내라! 살려내라! 살려내라고….”
꼬챙이처럼 바싹 마른 피해자의 남편은 말이 없었고, 언니는 그 자리에서 무너져 바닥을 치며 울었다.
아들은 주먹을 쥔 채 뭔가를 꾹 눌러 참는 듯 보였다.
현장검증은 A씨와 피해자 B(51)씨가 마주친 무학산 정상에서부터 살인이 일어난 6부 능선까지 두 사람의 동선을 따라가며 이뤄질 예정이었다.
9시 정각, 산 아래에서 간단한 피의자 인터뷰를 마친 뒤 곧바로 등반을 시작하는 것이 당초 시나리오였으나, 그것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유족들이 앞을 막았다. ‘얼굴을 공개하라’고 했다.
이 문제를 두고 경찰과 유족, 취재진 50여명이 한몸처럼 뒤엉켜 40분을 대치했다.
등반을 하기도 전에 땀이 흘렀다.
아주 짧게, 그러나 매우 수치스럽게, A씨는 유족 앞에 얼굴을 드러냈다.
여기저기서 빈 페트병과 욕설이 날아들었다.
9시 40분께, 등반이 시작됐다. 한 무더기의 병력이 선두에 폴리스 라인을 치고 A씨를 대동했고, 그 뒤를 유족들이 따랐다.
기자는 유족 뒤 후미에 따라붙었다.
큰비가 내린 뒷날이라 하늘은 맑았고 공기는 상쾌했다.
봄을 맞은 산은 온통 연둣빛, 사건이 일어난 지난가을도 등반을 하기에 좋은 계절이었을 것이다.
여경들의 부축을 받으며 앞서 가던 B씨의 언니는 기다렸다는 듯 많은 말을 쏟아냈다.
“제부랑 동생이랑 학생시절에 만났거든. 그렇게 마음을 키워가다가 결혼해서 애들 낳고 알콩달콩 안 살았나. 이 일 벌어지고, 온갖 몹쓸 소리를 들었지. 남편이 보험금을 노려서 그랬느니 어쩌니…. 식구들 얼굴 시커멓게 탄 거 봤제? 우리 속이 지금 그렇다.”
4일 오전 경남 창원시 무학산 정상 인근에서 '무학산 등산객 살인사건' 현장 검증이 실시되고 있다. /전강용 기자/A씨가 B씨를 성폭행할 마음을 품고 뒤따라온 시작점은 무학산 정상.
현장검증은 정상을 경유해 원계마을 쪽으로 하산하는 경로를 따랐다.
때문에 오후 1시가 넘어서야 살인이 일어난 6부 능선에서 본격적인 검증이 시작됐다.
시간은 참으로 무상했다.
4일 오전 창원시 무학산 정상 인근에서 '무학산 등산객 살인사건' 현장 검증이 실시되고 있다. /전강용 기자/지난가을, 시신이 발견된 장소 부근을 가득 메우고 있던 낙엽들은 사라지고 푸른 잎들이 앞다투어 돋아나 있었다.
과학수사팀이 등산복을 입힌 마네킹을 꺼내자 유족들은 한 번 더 분노했다.
“쥑이라! 뭐하러 살려두노! 대체 인권은 누구한테 있는 거고!”
A씨의 진술에 따라 경찰이 주로 범행을 재연했다.
뒤따라오던 A씨가 B씨를 등산로 옆 풀숲으로 밀쳐 넘어뜨린다.주먹과 발로 폭행하고 목을 눌러 실신시킨다.
실신한 B씨를 숲이 더 우거진 산비탈로 20여m를 끌고 내려간다.
성폭행을 시도했지만 이미 B씨는 의식이 없다.
낙엽으로 B씨의 몸을 덮어두고 산을 내려와 다음날 창원을 떴다.
그는 그렇게 사람을 죽였다.
폴리스 라인 안, 마네킹의 위치를 옮기며 경찰은 거듭 물었다.
“이쪽 방향으로 끌고간 거 맞아?” A씨는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장검증이 모두 마무리된 시각은 오후 3시께.
A씨는 ‘죄송하다’고 말하고 하염없이 울었다.
우는 그에게 B씨의 남편이 말했다.
“당신은 6개월을 살았지만 나는 6000번을 죽었다.”
김유경 기자 bora@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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