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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내가 사랑한 동화- 주향숙(시인)

  • 기사입력 : 2023-08-24 19:5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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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친구 집에는 계몽사 동화전집이 책장 가득 꽂혀 있었다. 하얀 이층집이었던 친구 집의 다른 것은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외동딸이었던 그 아이를 끔찍이 여기셨던 친구 부모님의 사랑도. 인자하셨던 할아버지도. 그런데 친구 방, 커다란 책장에 꽂혀있던 그 책들은 왜 그렇게 탐이 났었는지?

    또래보다 조금 성숙했던 어린 시절의 나에게 현실은 그저 따분하고 지루한 일상이었던 것 같다. 동화 속에서 나는 ‘방랑의 고아 라스무스’처럼 보헤미안이 되어 세상을 마음껏 떠돌 수 있었다. 방랑이란 단어가 주는 느낌이 얼마나 근사하게 좋았던지 누가 취미가 뭐냐고 물어오면 방랑, 이라고 답할 정도였다. 얌전한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열정이 가슴 가득 들끓고 있었다.

    하얀 사과꽃이 활짝 피어 있는 길을 달려 에이본리 마을의 매슈 아저씨네로 갔던 ‘빨강머리 앤’처럼 주근깨 가득한 귀여운 외모에 성격은 톡톡 튀고, 공부 잘하는 아이가 될 수도 있었다. 왠지 모르게 그 시절의 나는 조금 주눅 들어있었다. 예쁜 여자아이여야 했고, 막연히 그래야 할 것 같았고, 어른들이 정해놓은 규범대로 행동하며 칭찬받는 아이였다. ‘소공녀’처럼 진짜가 되고 싶어, 나도 귀하고 아름다운 소녀가 되고 싶어 머리 위에 책을 얹고 사뿐 걸어보기도 했다.

    동화 속 주인공들은 지금도 여전히 나의 세상 속에서 살고 있다. 진실하고 순수한 모습으로. ‘피노키오’처럼 코가 길어질까 두려워 거짓말은 하지 않았고, ‘빨간 구두 아가씨’처럼 밤새도록 춤을 추는 꿈을 꾸기도 했다. 양탄자를 타고 하늘을 날던 ‘알라딘’은 또 어떤가? 지니, 우리들의 요정. 내게도 그런 요술램프가 생긴다면 나는 무슨 소원을 빌까? 오래전에 잃어버린 막냇동생을 찾아달라고 해야겠다. 이번에는 가슴 속에 꼭 품고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장발장’은 빵 한 조각을 훔치고, 19년간의 감옥살이를 했다. 행여나 살면서 이런 억울한 시류에 휩쓸리게 되면 어쩌나, 가슴 졸였던 기억이 있다. 내일은, 횡단보도 앞에서 머뭇거리는 순간처럼 너무 많은 변수로 늘 두려웠다. 두려운 현실을 잊고 잠시나마 행복한 몰입의 순간에 빠질 수 있었던 것이 동화였다. 내게는 그랬다. 그리고 책 속 미리엘 신부의 거룩한 용서는 어린 나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하는 일, 지금도 어렵다. 미리엘 신부는 성당에서 은식기를 훔쳐 달아난 장발장이 경찰에 잡혀 오자 오히려 은촛대까지 주며 그를 용서한다. 장발장은 이를 계기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 용서.

    어린 시절 읽었던 좋은 동화들은 일찍부터 생각하는 삶을 살게 했고, 절망의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게 했으며, 다시 꿈꾸게 했다. 그리고 감성적인 좋은 이웃으로 살게 했다. 가끔은 아직도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가슴에 품고 움막 같은 산속 생활을 동경하며 행복해하는 내가, 현실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란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동화 속에서 나는 ‘앨리스’도 되고, ‘톰 소여’도 되어 어디든 마음껏 떠날 수 있으니 그지없이 행복하다. 다른 이의 형편을 살피고 보듬을 여유까지 주어진다.

    웃음을 잃어가는 많은 사람을 보았다. 어른들은 왜 웃지 않을까?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살아보니 알겠다. 웃을 수 없는 이유. 삶이 팍팍하고 고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차피 고단한 삶. 삶의 나머지 시간은 꿈꿀 수 있었으면 좋겠다. 동화와 같은 행복한 꿈을.

    주향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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