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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1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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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키우는 역사논술] (16) 구한말 이완용과 우리 사회

이완용의 논리가 오늘날 통용된다?

  • 기사입력 : 2009-12-3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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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마 대중들에게 알려져 있는 한국사 최악의 인물은 바로 이완용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이완용에 대해서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를 알아간다는 자체가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삶을 살펴보면 몇 가지 우리에게 던져주는 시사점을 엿볼 수 있다. 바로 이완용도 자기 나름의 ‘소신’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소신은 우리가 아는 좋은 의미는 아니다.

    그 소신이 어떻게 발현되는지 살펴보자.

    이완용의 첫 번째 소신은 ‘실리추구를 위한 변신’이다. 이완용은 철저하게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변신을 했다. 그는 젊은 시절에는 위정척사파에 가까웠다. 개화정책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서양 문물을 보고 나서는 생각이 바뀌어 개화파들과 마찬가지로 물 건너 유학도 다녀오면서 개화파들과 어울리기 시작한다. 이후 아관파천을 통해 친러세력이 되었고, 다시 친미세력이 되었다가, 친일세력으로 변하게 된다.

    이렇게 그는 수많은 변신을 통해 자기에게 철저히 이익이 되도록 했다. 문제는 ‘이익이 되면 누구와 손을 잡아도 그만’이라는 사고이다. 그 사고가 바로 매국의 논리로 이어지게 된다.

    1919년 3·1운동이 한창이던 시기, 이완용은 경성일보에 시위를 하는 군중들에게 고하는 글을 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군,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면 깨달아라. 제군, 미친 이가 아니라면 깨어나라. 잘 살다가 죽는 것이 사람의 상정이다. 제군은 왜 죽음을 스스로 택해서 호생(好生)의 덕혜에 복종하지 호랑이 수염을 건드리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는가?”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면 일본이 지배하는 것이 뭐가 문제냐는 것이다. 괜히 자존심 내세우다가 호랑이 털을 건드려서 인간의 가장 중요한 생명을 버리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내용이다. 요샛말로 하면 ‘다 먹고살자고 하는 건데, 왜 쓸데없이 목숨을 버리냐?’는 것이다. 이완용의 이런 논리는 현재에도 잘 통용되는 논리이다.

    이완용의 두 번째 소신은 ‘질서와 평화 중시’다. 무언가 이완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 같지만, 그는 이 단어들을 잘 사용하였고, 실제로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문제는 이 ‘질서와 평화’라는 단어 사이에 ‘강자와 시류에 대한 순종’이라는 단어가 생략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자연과 세계의 대세에 맞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이 일본과 하나가 되는 것은 당연한 시대적 대세이며, 동양은 일본의 선의를 받아서 함께 힘을 합쳐야만 서양세력과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으며, 그 결과 서양의 침략이라는 폭력을 상쇄하고 ‘평화’를 낳을 수 있다는 논리다.

    이완용에게 독립운동을 하거나 시위를 하는 이들은 바로 이러한 질서와 평화를 어지럽히는 존재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러면서 일제에 의해 저질러진 수많은 희생과 일제의 구조적인 폭력과 착취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이완용이 그것에 대해 침묵한 이유는 바로 세 번째 소신 때문이다. 바로 ‘경쟁’이라는 가치를 절대적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는 독립협회 회원이었는데, 독립신문에 수차례 경쟁을 강조하는 글을 싣는다. 물론 그가 말하는 경쟁이란 ‘원칙과 질서,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 따위는 접어두고, 무조건 상대를 눌러 이기는 것을 강조했다.

    그는 폴란드와 미국의 예를 들면서 ‘폴란드는 경쟁에서 뒤처져서 망했고, 미국은 승리했다. 좌우지간 우리가 미국처럼 되길 바란다’고 주장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당연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런 소신을 가지고 있었기에, 일제의 거대한 폭력에 대해서는 경쟁에서 패배했으므로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되었다. 그리하여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독립운동가들은 시류를 어지럽히는 존재로 인식한 것이다.

    이완용의 논리를 잘 살펴보면, 지금 우리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논리들과 상통하는 점이 상당히 많다. 필자가 일전에 반일을 외치면서, 한편으로는 일제의 식민사관 논리를 전혀 극복하지 못한 것을 언급하였다.

    이완용 또한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에게 이완용은 재론할 가치도 없는 최악의 인물이지만,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면서 어느새 이완용의 논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이완용이 살던 구한말과 21세기의 시대상황은 전혀 다르다. 논리가 비슷하다고 해서 덮어놓고 이완용과 똑같다고 누군가를 매도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이완용이 내세운 논리들이 그 시대에는 매국으로 이어졌으나, 지금 우리 시대에는 그 논리들이 무엇으로 이어질 것이냐에 대한 고민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완용의 논리들이 이 시대에 매국으로 이어지지는 않겠지만, 극단적인 물질 자본주의, 이기주의, 사회적 모순과 결합하여 그 논리들이 비인간적 논리로 귀결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린 과연 이완용에게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임종금 ‘뿌리깊은 역사논술’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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