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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ON] 부자 氣받기- 삼성·LG·효성 창업주 이야기 (16) 5·16과 한국비료 공장

[1부] 또 하나의 가족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16) 5·16과 한국비료 공장
세 번의 도전 끝에 울산공단에 비료공장 완공했지만…

  • 기사입력 : 2021-10-15 08:0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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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1년 5월 16일 군사혁명이 일어났다. 빈곤에서 벗어나고 부정부패를 추방한다는 명분으로 군사정부는 5월 29일 한국을 대표하는 경제인 11명을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시키는 등 초긴장의 정치 분위기가 되었다.

    이때 이병철은 일본에 있었기에 구속은 되지 않았지만 국내에서는 이병철이 귀국하지 않아 부정축재 혐의가 수습되지 않았다.

    경제 재건의 필요성을 인식한 군사정부도 이병철에게 여러 가지 신변 약속을 하고 귀국을 요청하자 6월 26일 이병철은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리고 박정희 최고회의 부의장실 부속실로 안내되었다.

    5·16 이후 부정축재 혐의 몰려 일본서 귀국
    1961년 한국경제인협회 초대회장에 선출
    경제인들 석방 대가로 기간산업 투자 명령
    우여곡절 끝에 1967년 한국비료 준공했지만
    한비사건 계기로 경영 못하고 국가에 헌납

    1967년 4월 20일 울산 한국비료 공장 준공식 장면./울산남구청/
    1967년 4월 20일 울산 한국비료 공장 준공식 장면./울산남구청/

    # 이병철과 박태준의 만남

    부속실에서 이병철을 맞이한 사람은 박정희 부의장 비서실장인 박태준으로 훗날 포항제철 회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분이다. 박태준의 회고록에 나온 이병철과의 첫 만남 내용이다. “부정축재 혐의로 몰려 일본에서 귀국 시기를 조절하면서 기다렸다는 분이 그런 정황과는 반대로 무슨 훈장을 받으러 온 듯 의연하고 당당했다.… 경제를 발전시켜 국가와 국민을 구하겠다는 혁명이 기업인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돈 버는 기업인을 죄인 취급하면 국민에게 일시적으로 환심을 살 수 있으나 경제는 발전시킬 수 없다. 서슬 퍼런 국가 최고 권력자 앞에서 누구도 섣불리 꺼낼 수 없는 말을 하였다.” 이병철과 박태준 두 사람은 일본 와세다대학교 중퇴라는 이력도 가지고 있다. 이날 인연으로 훗날 이병철은 박태준을 자주 불러 삼성그룹 경영에 대한 의견도 묻고, 삼성중공업을 직접 관리해보라고 제안하였던 일화도 있다.

    울산공업지구 기공식 장면. 기공식에 참석한 군인과 교복 입은 학생의 모습이 이색적이다./울산남구청/
    울산공업지구 기공식 장면. 기공식에 참석한 군인과 교복 입은 학생의 모습이 이색적이다./울산남구청/

    # 이병철과 박정희와의 만남

    박정희 최고회의 부의장은 이병철과 첫 만남에서 부정축재자 11명의 처벌 문제에 대해 의견을 물었다. 이병철은 “기업하는 사람의 본분은 많은 사업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고 세금을 납부하여 국가 예산, 국민교육, 도로항만 시설 등 국가운영의 뒷받침이 되는 일을 한다. 이런 행위를 부정축재자로 처벌하면 경제가 위축될 것이고 국가운영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며 부정축재자로 구속된 11명을 풀어 주기를 요청하였다. 또 “그들로 하여금 다시 한국의 경제를 살리고 더 많은 공장과 새로운 사업을 해야 우리가 잘 살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 한국경제인협회 창립

    1961년 8월 16일, 국가재건회의는 정부와 경제계와의 의견조정 기관으로 한국경제인협회 창립을 추진하였고, 이병철을 초대 회장으로 선출하였다. 이병철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맡은 공직이다. 경제인협회는 제1차 경제개발계획에 따른 경제인의 조직체로서 경제계의 대정부 창구 역할을 하였다. 경제계를 대표한 이병철은 박정희 의장을 다시 만나 경제인들에게 추징 벌과금 대신 공장을 짓도록 한 후 그 공장 회사의 주식을 정부에 납부하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이 의견을 받아들여 경제인협회에 최고회의 투자 명령을 지시한다. 투자 명령은 ‘부정축재자로 구속되었던 경제인을 처벌하는 대신 이들로 하여금 공장을 지어 경제건설에 참여시킨다’는 내용이다.

    경제인협회는 기간산업의 활성화가 우선 필요하다고 의견을 모았다. 정유, 제철, 시멘트, 비료, 나일론, 합성수지, 전기기기, 케이블 등의 공장 건설안을 최고회의에 제출하였다.

    1962년 1월 27일 송요찬 내각 수반이 공포한 울산지구 종합공업지대 승인 원문./대통령기록관/
    1962년 1월 27일 송요찬 내각 수반이 공포한 울산지구 종합공업지대 승인 원문./대통령기록관/

    # 울산공업단지의 탄생

    경제인협회가 제시한 기간산업 공장이 세워질 공업단지를 어디에 조성할 것인지도 중요한 과제였다. 공장을 세우기 위해서는 전력, 용수, 물류 수송, 노동력 확보 등의 필요조건이 있다. 공단은 이렇게 충족된 대규모 땅에 여러 공장을 모아 공업단지를 조성하여 각종 공장을 유기적으로 운영하는 능률적인 경제적 조치이다. 처음 후보지로 물금, 삼천포, 울산 등 3곳이 거론되었지만 1962년 1월 27일 울산이 최적지로 선택되었다. 이것이 지금의 울산공업단지 탄생의 배경이다.

    비료공장을 신청한 이병철도 울산공업단지 내 공장 건립을 추진하였다. 일본과 유럽업체에 계획서를 보내고 가계약 단계까지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병철의 대규모 최신설비공장은 당시로서는 자금이나 규모가 시기상조라는 정부의 경제정책 판단에 결국 수포가 되고 말았다. 두 번째 도전도 실패로 끝났다. 4·19혁명과 5·16 군사정변을 겪으면서 삼성이 입은 타격은 매우 컸다.

    이병철 회장이 한국비료 공장 준공식 축사를 하고 있는 모습.
    이병철 회장이 한국비료 공장 준공식 축사를 하고 있는 모습.

    # 세 번째 도전, 한국비료 공장을 준공하다

    1963년 10월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가 당선되었다. 어느 날 박대통령은 이병철을 불러 정부에서 모든 것을 지원할 테니 중단된 울산비료공장을 추진하도록 지시한다. 박대통령은 장기영 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불러 삼성이 비료공장을 짓는데 모든 책임을 지고 지원하라고 지시하였다.

    이병철은 1965년 9월 일본의 미쓰이물산과 공장건설 계약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한국의 민간차관 제1호 도입 신청서를 경제기획원에 제출하여 승인을 받았다. 1965년 12월부터 울산공업단지안에 약 35만평의 용지를 구입하고 공장부지 정지작업을 시작하였다.

    1966년 9월 16일, 한국비료 공장 완공을 얼마 앞둔 시기였다. 보세창고에 보관하던 약품을 현장 담당 직원이 착오로 당국의 허가없이 처분하여 벌금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런데 이것이 다시 정치적 논쟁으로 번지면서 일이 확대되었다. 한국의 대기업이 밀수를 했다고 언론은 매일 같이 6개월이나 기사를 써 삼성을 비난하였다. 이것이 소위 ‘한비사건’이다. 정치 관련 내용은 필자가 가능한 언급하지 않는 원칙을 가지고 이 글을 쓰고 있다.

    조선일보(왼쪽)와 동아일보의 1967년 4월 20일 한국비료 공장 준공 보도 내용./이래호/
    조선일보(왼쪽)와 동아일보의 1967년 4월 20일 한국비료 공장 준공 보도 내용./이래호/

    # 한국비료 공장 준공 후 국가에 헌납

    이러한 사회적 비난 속에 삼성이 공장건설을 진행하는 것은 무리라 생각하고 1966년 9월 22일 국가에 헌납할 것을 결심하였다. 비료 공장의 설립은 한국 산업의 중요한 것이기에 국가가 인수하여 완공토록 요청을 한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완성 후에 헌납하라고 요구하였다. 완공되어도 경영을 할 수 없고 국가에 헌납할 공장을 짓는 이병철의 심정은 어땠을까? 하지만 이병철은 한국비료 건설은 자신의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건설 작업에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1967년 4월 20일 한국비료 울산공장이 준공되었다. 10년에 걸쳐 세 번씩이나 도전하여 완공시킨 비료공장이다. 그러나 이병철은 이 비료공장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1967년 10월 16일 국가에 51%의 주식을 헌납하였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세계 최대의 비료공장을 내손으로 완공시켰다는 것만이 유일한 위안이 될 뿐이었다. 이병철은 “한국비료 사건을 파란 많던 자신의 생애에 더할 나위 없는 쓰디쓴 체험”이라고 하였다.

    # 건설현장에 나타난 노무현 대통령

    울산 비료공장 건설현장에 20대의 젊은 청년이 현장 일을 하러 왔다. 고시공부를 하려던 청년이 책값을 벌기 위해서였다. 당시 하루 일당은 180원이었는데 한끼 식사값은 35원으로 하루 밥값이 105원이나 지출되었다. 이 청년이 훗날 대한민국 제16대 노무현 대통령이다. ‘여보 나좀 도와줘’ 자전에세이 중.

    <이병철의 한마디> 인내는 일을 지탱하는 자본이며 희망을 갖는 기술이다.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 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 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 관광사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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