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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7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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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간이역] 식물성 오후 - 정용화

  • 기사입력 : 2021-04-15 08:4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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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걷지 않는 발은 뿌리가 된다

    버스를 타려고 언덕을 내려갈 때면

    지팡이 하나에 의지한 채

    힘겹게 서 있는 노인을 만날 수 있다

    꽃도 다 시들어버린 목련나무 옆에서

    수직으로 내리는 햇살을 온몸으로 받고 있다

    오래 걸어왔던 걸음이 제 그림자에 갇혀있다

    분주함도 사라지고 야성적 본능이

    식물성으로 순해지는 시간

    미련이 없으면 저항도 없다

    조금씩 땅속으로 스며들고 있는 그 노인

    물끄러미 행인들을 바라보고 있다

    저 무심함이 품고 있는 견고한 내력들

    나 한때 저 목련나무의 꽃으로 핀 적이 있다

    나무가 되어가는 노인과

    죽어야 비로소 걷는 나무가

    한 몸이 되어있는

    ☞ 신록이 아름다운 계절이다. 싱그러운 연둣빛이 초록으로 달려가고 있다. 한곳에 머물러 있음에도 사계절의 변화를 가장 빠르게 표현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나무들이다. 식물의 적극적인 표출 방법에 경탄을 금치 못한다. 그렇다면 동물에서의 식물성이란 어떤 면모일까?

    ‘걷지 않는 발은 뿌리가 된다’ 시의 첫 구절이 던지는 사유가 묵직하다. 동물과 식물의 경계가 사라지는 순간을 지팡이에 의지한 채 힘겹게 서 있는 노인에게서 발견한다. ‘스며들고 있는’, ‘물끄러미’, ‘무심함’, ‘견고한 내력’과 같은 단어들이 식물화되어 가는 상태의 의연함을 잘 묘사하고 있다. 더 나아가 생명의 윤회성으로 사유를 확장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못다 핀 꽃 한 송이까지 마저 피워야 하는 봄! 봄이다. 부디 ‘미련이 없’는 ‘야성적 본능’에 머물 수 있기를…. 유희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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