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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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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시론] 줄다리기에서 배우는 삶의 지혜- 김일태(시인)

  • 기사입력 : 2021-03-07 20:2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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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로나 팬데믹의 영향으로 매년 연초에 정례적으로 열리던 행사들이 줄줄이 취소되었다. 여러 행사 가운데서도 특히 아쉬운 것은 매년 그 맥을 이어가야 하는 전통민속놀이 행사들이다.

    우리나라 세시민속행사 200여 개 중 4분의 1이 음력 정월에 집중되어 있다. 그중 가장 규모가 크면서도 다양한 전통문화와 풍습을 담고 있는 것이 정월 대보름을 정점으로 전국 각지에서 펼쳐진 줄다리기이다.

    옛 선조들은 설 제례를 지내고 나면 본격적으로 줄다리기 준비에 들어갔다. 편을 나누어 정성 들여 짚을 추려서 새끼를 꼬고 덕석처럼 엮고 말아서 어린아이 키 높이만 한 거대한 몸줄을 만들고 지네 발 같은 벗줄을 달면 줄이 완성됐다. 수많은 사람이 어깨로 메고 풍물에 맞춰 용틀임하듯이 줄을 경기장으로 옮기는 과정도 장관이었다. 줄을 당기기에 앞서 마을을 상징하는 수많은 서낭대의 싸움, 동서 양편, 음양, 남녀 교합을 상징하는 걸고리 모양의 고를 비녀목으로 연결하는 고싸움은 해학과 풍자가 넘쳤다. 그런 다음 대규모 연합 풍물패의 장단, 양편 장수들의 지휘와 깃발들의 응원에 따라 수천 명이 줄에 매달려 “우이여차 우이여차” 우렁찬 함성으로 힘을 겨루면 가히 절정의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그뿐 아니라 줄당기기가 끝나면 참여한 모든 이들이 ‘쾌지나칭칭나네’를 함께 부르며 신명 나는 뒤풀이를 펼쳤다.

    농경문화가 급속히 사라지면서 줄다리기도 크게 쇠퇴했지만, 이 줄다리기는 줄을 당겨 서로 힘겨루기 하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고을의 모든 주민이 함께 줄을 들이고 당기고 또 신명과 애살로 어울려 노래하고 춤추며 화합하는, 즉 일하고 싸우면서 단결과 화합을 이루어내는 전 과정에 다양한 전통적 정신 문화를 담고 있다.

    우선 줄다리기는 이기고 지는 결과보다 줄을 만들고 힘을 겨루고 뒤풀이로 서로 어울리는 전 과정을 중요시한다. 보름 가까이 걸리는 전 과정에 온갖 재미나는 풍습과 삶의 철학이 깃들어 있다. 그래서 ‘줄당기기’라 하지 않고 줄을 들이고 당기는 의미를 담아 ‘줄다리기’라고 부르는 것이다.

    다음으로 대동단결의 정신이다. 짚 한 가닥은 대략 2.5㎏의 무게를 견뎌내지만 두 가닥을 꼬면 7.5㎏, 세 가닥을 꼬면 12㎏ 정도의 무게를 견뎌낸다. 짚 한 가닥은 보잘것없는 힘을 가지지만 열 가닥 백 가닥 수천 가닥이 서로 얽히고 묶이면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힘을 갖는다는 것이 줄다리기가 품고 있는 대동단결의 정신이다.

    다음은 동서양의 모든 경기가 앞으로 상대를 쳐들어가 물리적으로 제압해야 하는 데 반해 줄다리기는 뒤로 물러나야 이기는 싸움이다. 상대를 끌어안고 내가 양보해야 궁극적으로 이기는 것이 줄다리기의 정신이다. 그래서 줄다리기는 승패의 구분이 없다. 졌다고 기분 나쁘거나 이겼다고 우쭐대는 경기가 아니다. 동편이 이기면 풍년이 들고 서편이 이기면 평화가 깃든다는 격이어서 궁극적으로 모두가 이기는 싸움이다. 그래서 화합과 신명으로 모두가 하나로 어울리는 흥겨운 굿판이 연출되는 것이다.

    요즘 날마다 따뜻하고 희망적인 전망보다 분노와 안타까움, 한탄의 소리가 뉴스에 넘쳐난다. 상대를 좀 더 이해하고 포용하고 배려하는 정신은 실종되고 과정과 절차를 무시하는 일들, 왜곡되고 자학적이며 위선적인 언행으로 상식을 덮거나 궤변으로 갈등을 부추기며 여론을 호도하는 일들이 우리를 더욱더 힘들게 하고 있다.

    사회 구성원들의 협력과 대응이 얼마나 중요한지 코로나-19 방역을 통해 경험하고 있는 우리에게 대동놀이의 큰 굿판 줄다리기가 시대를 초월하여 올바른 삶의 길을 한 수 가르친다. 그 허울과 껍데기를 벗고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인권과 역량을 줄을 들이듯 하나로 엮어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거대한 신명으로 승화시켜 내라고, 그리하여 다시 한번 풍요와 자유가 넘치는 ‘한국의 기적’을 만들어내 보라고.

    김일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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