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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3월 04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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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오순도순 작은 행복 - 황영숙 (시조시인)

  • 기사입력 : 2020-11-26 21: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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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모의 꼬부라진 손톱이 다 닳았다/우거진 야생의 덤불 다 걷어내기까지/밥 벌러 집나간 아들 신불자는 면했는지/미더운 영감가고 철망도 없는 밭을/시뻘건 비료포대가 외다리로 지키는데/후다닥, 스치는 새끼 오소리 눈망울이 아리다/오금 못 편 고용살이 제발 데려가라고/하늘에 대고 냅다 상앗대를 내지르자/와르르 쏟아진 별들 가막사리 씨가 됐다’ -(시 ‘12월’)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전망이 뛰어난 남향의 아파트다. 사글세에서 전세로, 전세에서 내 집으로 무려 열두 번이나 이사를 하며 마련한 집이다. 생각하면 힘들고 아픈 나날들이었지만 삶의 공간을 하나씩 하나씩 키워 나간 참 알뜰한 시간들이기도 했다.

    이 집은 남쪽으론 시드니 항구 같은 먼 바다가 보이고 북쪽으론 멋진 장복산이 아우르고 있다. 그야말로 배산임수의 위치에 앉아 있는 집이다. 집값이 오르거나 내리거나 개의치 않고 그동안 고생했다고, 신이 나에게 준 선물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아파트 후문을 나서면 산으로 이어지는 등산길이 나오는데 이 길은 내가 이 집에 살면서 받는 매일매일의 보너스다.

    어릴 때 우리 형제자매들은 고구마로 끼니를 때웠다. 아버지께서 소로 쟁기를 몰고 고구마를 캐시면 나는 아버지 뒤를 따라가며 고구마를 주웠다. 지금은 고구마가 영양소가 많은 식품으로, 다이어트식품으로 각광을 받고 있지만 그 당시엔 목젖까지 신물이 차올라 오던 지겨운 주식이었다. 그 신물나던 고구마가 질리지도 않은지 나는 지금도 고구마를 좋아한다.

    날마다 나는 산길을 오른다. 오르다 보면 등산로 초입의 양쪽에 누군가 정성껏 쌓아올린 여러 개의 돌탑들이 나온다. 산을 오르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선 합장을 하고 한 가지씩의 소원을 빌며 숙연해진다. 돌탑은 위태위태하면서도 몸뚱이를 잘도 버틴다. 돌 위에 또 돌, 얹고 또 얹어도 수많은 비와 모진 바람이 몰아쳐도 끄떡없이 잘 버틴다. 얹혀질 딱 그만큼의 마음과 크기로 하나씩만 얹기 때문이 아닐까. 나도 욕심 없는 마음 하나 조심히 얹어본다.

    돌탑 주변에는 칸나 꽃들이 무리지어 피어 있다. 누가 심고 가꾸었는지 모르지만 겨우내 알뿌리로 엎드려 있다가 봄에 싹을 틔우고 여름 내내 꽃을 피운다.

    11월까지 선홍으로 피우다가 12월이 되면 멈춘다. 아직도 몇 송이가 남아 추위를 견디고 있다. 견디는 꽃잎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꽃마다 꽃잎이 하나씩 접혀 있다. 접힌 꽃잎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모르지만 반쯤 접힌 붉은 입술 겉봉을 뜯어보면 보드란 살결에 맺힌 눈물이 아직 뜨겁다.

    돌탑을 지나 조금 내려가면 바랭이와 가막사리 풀로 뒤덮인 밭이 하나 나온다. 작년까지만 해도 어느 노모가 일구어 가꾸시던 목숨 터 같은 곳이다. 비료포대를 막대기에 꽂아 허수아비를 만들고 작물을 지켜냈던 곳, 그 허수아비를 먼저 가신 영감님이라 의지하며 버텨 낸 불굴의 토지, 이곳에 이제 노모는 보이지 않는다. 편찮으신 걸까? 아니면 돌아가신 걸까? 성공해서 돌아올 자식을 기다리며 끈을 놓진 않으셨을 텐데….

    언젠가 별이 되고 싶었던, 별이었던 노모의 꿈이 가막사리 씨앗으로 맺힌 건지 씨앗들이 유난히 많다. 저 씨앗들이 다시 별로 떠 반짝거리고 집 없는 사람들이 오순도순 따뜻하게 지낼 12월 어느 날이 왔으면 참 좋겠다.

    황영숙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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