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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허수아비의 시간- 김미숙(시인)

  • 기사입력 : 2020-11-12 20: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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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느 날 단풍잎 노란 시골길을 가다가 눈에 띄는 풍경이 예사롭지 않아 잠시 차를 세웠다. 한때 풍성하던 논은 이미 가을걷이가 끝났고, 들판 곳곳 짚단을 싼 비닐포장들이 마시멜로처럼 둥글게 말려 있다. 그 사이에 홀로 서 있는 저 허수아비 하나. 요즘은 참새 쫓을 일도 없고 추수가 끝난 마른 논인데 허수아비가 필요할 리는 없다. 누군가 재미삼아 만들어 세웠다가 그대로 둔 모양이다.

    순간, 바람이 휙 불고 마른 잎과 지푸라기들이 허수아비를 스치고 지나간다. 어디선가 연기냄새 같은 알싸한 향이 배어 있기도 한 풍경, 꽉 찼다가 갑자기 비어버린 공간이 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느낌으로 다가와 가슴을 흔들었다. 하루 스물네 시간을 쪼개서 뛰어도 시간이 모자라는 생을 사는데, 어디 여행 한 번 가려해도 팍팍한 시간에 떠밀려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데, 빈 들판의 허수아비는 저렇게 여유롭다니. 다리가 붓도록 뛰어봤자 단 몇 분의 여유도 누리지 못하는데 다리가 하나뿐인 허수아비는 그마저 땅에 깊숙이 묻고 서 있어도 여유롭기만 하다니.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억울한 느낌마저 들었다.

    순간, 나의 시간과 저 허수아비 시간은 왜 다른지 생각하다가 한때 풍성하던 벼들이 떠난 빈 들판을 바라보는 여유도 가졌다.

    멀리 보이는 고속국도에는 차들이 바람같이 달리고 있다. 달리는 행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진다. 이 길만이 살길이라며 기를 쓰고 달려가는데 반대 차선에선 그 길이 아니라며 줄지어 거꾸로 달리는 것처럼 보인다. 모두 세상 끝까지 달리고야 말 듯한 기세들이다. 어쩌면 나도 그 끝에 찰싹 붙어 달려왔을 것이다. 한적한 길에 차를 멈춘 채 달려온 길을 보니 비로소 내가 서 있던 곳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다들 어디로 가는 걸까. 그 길이 맞게 가는 길이기는 한가. 틀렸다면 돌아서 다시 뛰어갈 생각이나 있는가?

    순간, 낮은 바람이 휙 불고 마른 지푸라기와 먼지가 허수아비를 스친다. 그때 문득 든 느낌. 마른 지푸라기나 먼지가 아니라 시간이 허수아비를 관통해서 지나가는 것 같았다. 그랬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에 떠밀려 목적지도 없이 허겁지겁 달려가지만, 허수아비는 벌판에 다리를 묻고 서서 시간의 흐름을 유유자적 즐기고 있지 아니한가. 가만히 있어도 시간은 나를 관통하며 저 혼자 지나간다.

    지는 태양을 애써 잡으려 달려가지 않아도 태양은 붉게 떠서 내 머리를 지나 다음 시간을 기약한다. 오늘이 지나면 내일의 태양이 다시 뜬다고도 말한다.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 오늘이 될 것이고, 달이 지나고 계절이 나를 관통하며 순환할 것이다. 애써 찾으러 가지 않아도 모든 것은 순환하고 다시 오니까. 그런데 왜 나는 쉬지도 못한 채 목적지도 없이 숨차게 달리고 있었던 것일까. 무엇을 찾으러?

    안다. 사람은 걷고 달리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허수아비처럼 가만히 서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는 없다는 것도 안다. 그렇지만 숨 가쁘게 달리는 동안 그것이 관성이 되어 무엇인가 잃고 가는 것은 없는지 한 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때로는 허수아비처럼 서서 세상과 자신을 관망하며 여유를 가져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미 우리는 그 정도의 작은 여유마저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이 가을 허수아비를 보며 다시 생각한다. 가을이니까.

    김미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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