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간이역] 가을날- 김사인
- 기사입력 : 2020-10-22 08: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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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지 가을볕은
뽀뿌링 호청같이 깔깔하지
가을볕은 차
젊은 나이에 혼자된 재종숙모 같지
허전하고 한가하지
빈 들 너머
버스는 달려가고 물방개처럼
추수 끝난 나락 대궁을 나는 뽁뽁 눌러 밟았네
피는 먼지구름 위로
하늘빛은
고요
돌이킬 수 없었네
아무도 오지 않던 가을날
☞“좋지” 이 시의 시작이 좋지 않습니까? 그래요! 가을날, 가을볕에 대해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요? 그러나 그 서두름이 심상치 않습니다. 급하게 무슨 얘기를 꺼내려 시작부터 “좋지”로 운을 떼었을까요?
다음 행에 바로 뽀뿌링 호청이 나옵니다. 볕은 볕인데 깔깔하고 차갑다니요. 아, 가을볕을 이보다 더 감각적으로 나타낼 수 있을까요? 그 허전함과 쓸쓸함이 청각과 촉각을 생생하게 자극합니다. 나락 대궁을 기어이 뽁뽁 눌러 밟으며 모든 것이 지나가 버린 것을, 돌이킬 수 없음을 거듭거듭 확인하고 있습니다.
먼지구름만 피어오르는 빈 들과 빈 가슴 너머로 고즈넉한 가을 하늘빛의 고요!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은 쓸쓸함을 하늘빛의 고요로 승화시키는 극적인 대비가 이 시의 균형을 끝까지 잡아갑니다. 아, 인생의 가을도 그렇게 밀고 당기며, 허전하고 한가하게 깊어가나 봅니다. 유희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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