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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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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포럼] 신앙, 이웃의 생명이 넘쳐흐르는 강가에 닿기를- 이이화(연구공간 파랗게날 대표연구원)

  • 기사입력 : 2020-09-28 20: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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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년 초입에 들이닥친 ‘코로나19’는 문명사회를 비틀고 있다. 그 공세에 대응하려는 모두의 고초가 말이 아닌 차, 한국교회총연합회 회장은 이렇게 말한다. “신앙을 생명 같이 여기는 이들에게는 종교의 자유라고 하는 것은 목숨과 바꿀 수 없는 가치다.” 바이러스 전염의 주요 고리가 되는 대면예배 자제가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지는 차치하고, 그의 말을 바꾸어보면 “이웃이 코로나 바이러스로 죽어나갈지언정 우리는 우리 길을 가겠다”란 말이 된다. 대단한 결기이다.

    유약한 원시인류는 무리를 짓고 터전을 이루면서 의지할 절대자를 찾았다. ‘짐승’과는 다른 정신세계를 구축해나갔다. 그렇게 인류는 존재하면서부터 생각 있음과 무리지음과 믿음이 함께해왔다. 종족간의 부침, 대자연의 격변에 따라 모양도 색깔도 지향점도 천차만별로 진화했지만 그들 속에 함께해온 종교의 목적은 하나로 모아졌을 것은 당연지사이다. 공동체의 안녕.

    삼천리반도 금수강산은 그것 자체가 오묘하다. 유려한 산과 강, 바다와 육지를 모두 갖춘 지리적 미려함에 더해 강력한 대륙과 해양 세력의 교차점이라는 지정학적 공교로움으로 인해 모든 것이 풍성하다. 슬픔도 넘치고 기쁨도 허다하다. 역사는 파란만장하고 문화는 다채로우며 정치는 긴박하고 경제는 역동적이다. 오죽하면 어느 외국 영화감독이 소재가 흘러넘치는 한반도의 한이 부럽다고 했다지 않던가. 깊이 든 멍이 때론 예술로 승화하기도 한다.

    하여튼 그 풍성한 심성에 어긋나지 않게 이 땅의 사람살이에 신앙도 종교도 넉넉하여, 토종종교든 외래종교든 사이비종교든 이 땅에선 번창하다. 이 종교들이 대개 삶에 찌든 민초들의 곤란을 위로하고자 하는 산물이긴 하나, 때론 가진 자들의 위안을 위해 있기도 하다. 그러면 이 넉넉하면서도 넉넉지 않은 땅에서 종교는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까?

    구한말 선교사들에 의해 ‘수입’되기 전에 살다간 한반도의 영혼들은 어찌 구원의 길을 찾을까 싶을 만치 종교 특히 기독교가 작금에 여러 화두에 올라 있다. 멀지않은 우리 역사에서 이 종교의 이면을 드러낸 주요 사건으로 제주 4·3을 빠뜨릴 수 없다. 참담하고도 참담한 비극. 식민의 혹독한 터널을 빠져나왔구나 싶던 동족을 향한 무모한 살육이 가능했던 토양은 한민족 모두의 죄업이다. 그 살육의 한 주체가 남하한 기독교인 ‘서북청년단’으로, 좌익에 대한 적개심은 짐작하려 해도 민간인들까지 잔혹하게 살육함으로써 분풀이를 할 수 있다니, 종교가 어디까지 가능한가 묻게 된다.

    어느 불구덩이 속에도 안간힘을 쓰는 인간이 있다. 해방되었으나 해방되지 않은 미군정에서 제주 시민의 동요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던 김익렬 9연대장. 그의 시도는 미군정에 의해 좌절되고, “30만 제주도민 모두 죽여도 좋다”며 만행을 서슴지 않는 후임 박진경을 암살한 제3중대장 문상길 등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법정 최후진술에서 그가 꿈꾼 공평한 세상은 하나님 앞이었다. “이 인간의 법정은 공평하지 못해도 하나님의 법정은 절대적으로 공평하다.”

    공평한 하나님나라를 꿈꾸며 변화를 주도하고 교회가 우리 공동체의 건강성을 위해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는 움직임을 기억한다. 하지만 예수가 걸은 십자가의 길과 사명, 이웃사랑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이런 목소리는 축복과 성장을 약속하는 물량적 교회의 목소리에 묻혀버리곤 한다. 어떠한 회의도 없이 오로지 “믿습니다”만을 외치는 ‘지성결핍’이 우리 기독교를 휩쓸고 있다. 예수를 좇아 고난의 언덕을 오르는 이는 여전히 외롭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면 한국을 위한 예수가 아니고 예수를 위한 한국이 되니 이것이 어쩐 일이냐. 이것도 정신이라면 정신인데 이것은 노예정신이다”라고 단재 신채호 선생은 말했다. 잠시 깊은 명상이 있어야겠다. 우리는 그 속에 나는 어디에 있는가. ‘질문하는 교인’이 왜 이토록 그리운가. 종교가 이웃의 생명이 강물처럼 넘쳐흐르는 언덕에 가닿기를. 무한 자유를 만끽하고픈 가을이다.

    이이화(연구공간 파랗게날 대표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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