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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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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통영 원문을 지나며- 정해룡(시인)

  • 기사입력 : 2020-09-08 20: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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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성에서 14번 국도를 통해 통영으로 가자면 반드시 넘어야 할 고개가 있다. 바로 원문(轅門)이다. 원문이란 통제영 당시 군영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예전 원문에 검문소가 있어 군경이 오고가는 차량들을 무시로 검문하면서 탑승객의 신분증을 확인하고 신분증의 사진과 얼굴을 일일이 대조를 했다. 검문 중에 승객의 인상이 좋지 않거나 태도가 불량하면 더러 곤욕을 당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이 고개를 지날 때마다 박경리 소설의 어느 한 구절을 떠올린다. “타관의 영락한 양반들이 이 고장을 찾을 때 통영 어구에 있는 죽림고개에서 갓을 벗어 나무에다 걸어 놓고 들어온다고 한다. 그것은 통영에 와서 양반행세를 해봤자 별 실속이 없다는 비유에서 나온 말일 게다”(〈김약국의 딸들〉‘통영’) 소설에 나오는 죽림고개란 원문을 가리킬 것이다.

    나는 또 원문고개를 지나칠 때마다 원문고개 아래에 “통정대부행함안군수전별향사오공횡묵사적비”란 선정비가 남아 있는, 조선시대 마지막 청백리로 살다간 고성 부사 오횡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오횡묵은 1893년 1월 29일 함안 군수에서 고성부사로 발령을 받아 통제사에게 부임신고를 하려고 원문고개를 넘고 있을 때였다. 원문을 중심으로 10리 주변의 6개 마을 대표 20여 인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오횡묵을 보고 길을 막으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병술년(丙戌年1886)에 대기근이 들어 들판에서는 죽어나가는 사람이 부지기수고 시체 썩는 악취가 진동했을 때 오횡묵이 고종의 특명에 의해 별향사로 파견 되어 통제영의 백성들을 구휼하여주었기에 그 은혜를 기리고자 술과 안주 등의 음식을 준비해 영접코자 함이었다.

    이러한 오횡묵이 고성부사로 재임하면서 베푼 선정은 정약용의 목민심서가 가리키는 그대로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쓴 〈고성총쇄록〉을 읽어보면 고성이 얼마나 다스리기 어려운 고을인지를 알 수 있는 이런 구절도 있다. “전에 함안에 있을 때 매양 영남에서 다스리기 어려운 고을이 함안이라 하였는데, 이 고을에 비하면 함안은 오히려 누워서 다스린 고을이었다”고 기록해 놓았다.

    그는 틈만 나면 고성의 구석구석을 직접 방문하여 민초들의 어려움이 무엇인지 목도하고 이를 시정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나는 원문고개를 지날 때마다 오늘날 고성군수와 통영시장을 오횡묵과 대비해 보게 된다. 고성군수나 통영시장은 오횡묵이 남긴 행정일기〈고성총쇄록〉을 한 번 읽어나 보았는지, 읽어 보았다면 오횡묵을 닮아서 부단히 민초들의 어려움을 찾아 해결하려고 밤낮으로 노력하다 행여 건강이나 상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다가 올 선거에서 재선을 의식해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내편 네편 따져 내편만 편애하는 편 가르기나 분주히 하고 있지 않은지를.

    정해룡(시인)

    ※소통마당에 실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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