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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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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풍수지리] 죽음을 각오하고 군주 일깨운 충신 박태보

  • 기사입력 : 2020-08-28 08: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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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 재 민 화산풍수지리연구소장
    주재민 화산풍수지리연구소장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원자를 정하는 문제를 계기로 남인이 서인 축출) 때 인현왕후의 폐위를 강력히 반대하는 소를 올리는 데 주동적인 역할을 해 모진 고문을 받고, 36세에 유명을 달리한 조선 중기의 문신이 있다. 서인에 속한 정재(定齋) 박태보(朴泰輔)가 그 주인공이다. 재주가 뛰어나고 학문도 깊었으며 시비를 가리는 데는 조리가 정연할 뿐만 아니라 비리를 보면 과감히 나섰던 곧은 성품을 가진 인물로 죽은 뒤 왕은 곧 후회했고, 충절을 기리기 위해 정려문을 세우고 이조판서에 추증했다. 역사서를 보면 박태보가 공로도 있었으나 과실 또한 있었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남인과 서인의 당파 싸움이 한창일 때, 그 자신은 죽음을 각오하고 군주를 일깨우려고 했다.

    광복절은 빼앗긴 나라의 주권을 되찾은 날로 국민이 하나되는 날이다. 김원웅 광복회장은 대통령의 심기를 지레 헤아렸는지 자신의 투철한 사상 의식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 나라를 구한 이를 역사 속의 죄인으로 만들어 부관참시(剖棺斬屍·무덤을 파서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자름)를 주창하면서 과거 자신은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보수 정당에서 일했다”고 말을 했다. ‘죽음을 무릅쓰고 불의에 맞선 자’와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빌붙은 자’의 차이는 나라가 위기의 상황에 내몰릴 때 어떻게 처신하는가를 보면 알 수가 있을 것이다. 광복회장 만큼은 국민이 화합할 수 있도록 정기(精氣)를 불어넣는 역할을 해야 한다.

    박태보는 자신이 죽을 줄 알면서도 군주에게 바른말을 한 인물이다. 어느 누가 그의 죽음을 의롭다 하지 않겠는가. 모진 고문을 받고 유배 도중 숨을 거둔 박태보의 묘는 의정부시 장암동에 있다.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 고택 좌측으로 100m 정도 올라가면 있으며, 그 묘에서 또 100m 정도 올라가면 ‘부친 박세당의 묘’가 있다. 주산(뒷산)인 ‘수락산(638m)’에서 뻗어내려 온 산줄기는 단아한 형상으로 좌우로 요동하고 상하로 기복하며 박세당 묘에서 명혈(明穴·명당자리가 되는 혈)을 맺었다. 박세당 묘는 묏자리 주변이 꺼져 있어 마치 돌혈(突穴·우뚝 솟은 혈)같은 형태이며 좌청룡(좌측 산)은 묘 앞으로 돌아 안산(앞산)의 역할도 함께 하고 있고, 우백호(우측 산)는 위엄을 갖추고 있다. 박세당 묘는 생기가 가장 충만한 곳에 정확히 조성됐다. 부친 박세당 묘의 좌청룡 아래로 뻗은 또 다른 산줄기에 쓴 박태보 묘는 좌청룡과 우백호가 뛰어나지만 안산이 없다보니 흉풍을 막기 위해 나무를 빽빽이 심어 비보(裨補·허한 부분을 보완함)를 했다. 묘는 주산으로부터 근본을 갖추고 내려온 산줄기의 가장 생기가 왕성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살아서 심한 고문으로 인해 갈기갈기 찢겨진 육신이 죽어서는 안식을 취했으리라 생각한다.

    박태보의 부친 박세당은 40세에 관직에서 물러나 수락산 석천동(지금의 장암동 일대)으로 들어가 집을 짓고 학문 연구와 저술에 힘썼다. 고택은 수락산 일대에 박태보의 조부이며 박세당의 부친인 박정이 인조반정의 정사공신이 되면서 받은 사패지(賜牌地·임금이 내려준 논밭)에 지었으며, 사랑채 앞의 400년 된 은행나무와 함께 전해내려 오고 있다. 주산에서 이어져 내려온 산줄기가 멈추면서 지기(地氣·땅기운)가 응집된 곳에 사랑채가 있으며 지맥(地脈·산줄기)에 순응하면서 안산인 ‘도봉산(740m)’의 멋진 풍광을 바라보기 위해 서향으로 지었다. 대로에서 꾸불꾸불한 소방도로를 100m쯤 들어간 곳에 고택이 있기에 바로 때리는 살기(殺氣)와 흉풍을 맞지 않으며 양쪽 물이 만나는 안쪽에 위치해 땅심이 뛰어나다. 하지만 대문 외에 문이 없는 또 다른 외부 통로가 안채 옆에 있어 ‘옆구리가 터진 집’이 됨으로써 생기가 쉽게 빠져나가게 한 것은 흠이었다. 그럼에도 사랑채와 안채와 사당은 수맥을 피해 ‘생기터’에 자리하고 있다. ‘충절의 표상 박태보’, 사람은 가고 없지만 그의 충절은 후세에 길이 기억될 것이다.

    주재민 화산풍수지리연구소장

    (화산풍수·수맥·작명연구원 055-297-3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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