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3월 30일 (토)
전체메뉴

[생활 속의 풍수지리] ‘해가 없는 묘’라면 노력하기에 달렸다

  • 기사입력 : 2020-06-05 07:58:09
  •   
  • 주 재 민 화산풍수지리연구소장
    주재민 화산풍수지리연구소장

    경기도 남양주시 삼패동에 조선 제일의 개혁가이자 명신이었던 김육(金堉·1580~1658)의 묘가 있다. 본관은 청풍(淸風)이고 호는 잠곡(潛谷)이며, 기묘팔현(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인물들)의 한 사람인 김식의 4대손이다. 1628년 홍문관 수찬, 이조 좌랑, 이조 정랑이라는 요직을 역임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 이조 정랑은 삼사 관원의 천거권을 가져 권한이 정승인 삼공에 버금갔다고 기술했다. 1633년 정3품 동부승지를 거쳐 1644년 이후 정2품의 형조판서와 예조판서에 올랐으며, 1651년 영의정으로서 ‘인조실록’ 총재관을 겸임했다. 1660년 5월에 현종은 시호를 ‘문정’으로 정했다.

    김육은 충청도와 전라도 대동법 시행, 동전 주화 제도(동전 통용책)와 서양 역법인 시헌력의 도입·시행을 했으며, 수차(水車·물레방아)와 수레의 제조 및 보급에 앞장섰다. 율곡(栗谷) 이이가 대동법을 최초로 제안했다면 선조, 광해군, 인조 대의 삼대에 걸쳐 영의정을 역임한 오리(梧里) 이원익은 대동법을 경기도와 강원도에 정착시킨 데에 큰 공헌을 했으며, 김육은 죽을 때까지 대동법의 전국적 시행에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장남인 김좌명이 대동법의 전국적 시행을 계승하도록 했다. 김육은 비록 율곡과 오리 같은 천재는 아니지만 부단한 노력으로 큰 업적을 남겼으며, 1658년 향년 79세로 세상을 떠났다.

    묘는 양 옆과 뒤를 감싸는 ‘U자형’의 곡담(곡장)과 비석, 문인석, 망주석, 상석이 놓여 있으며, 정경부인 파평윤씨(坡平尹氏)와 합장(合葬)을 했다. 비석 하단에 새긴 ‘부좌’는 묘 위쪽에서 내려다볼 때 좌측에 합장되어 있다는 뜻이다. 용맥(龍脈·뒷산 줄기)은 백봉산(587m)의 한 줄기로 근본을 갖추었지만, 당판(묘와 그 주변)에 비해 너무 넓고 급하게 내려와 광중(무덤구덩이)에 생기(生氣)를 완전히 묶어두기에는 다소 약한 면이 있다. 좌청룡(좌측 산)과 우백호(우측 산)는 벌어져 있어 묘를 치는 흉풍과 살기(煞氣)를 막기에 부족하지만, 나무를 빽빽이 심어두어 부족함이 보충되었다. 안산(앞산)은 앞쪽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살기를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데 도로 너머에 있기 때문에 제 역할을 하기 어렵다. 묘와 도로(고산로)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깝긴 하나 다행히 도로보다 높은 곳에 있고 묘 정면에 놓인 비석이 흉풍을 맞지 않도록 ‘바람 길’을 바꾸어놓아 묘는 해(害)를 입지 않고 있다. 생기가 충만한 곳은 아니지만 무해지지(無害之地·해가 없는 땅)이므로 후손이 노력하기에 따라 성공할 수 있는 터이다.

    묏자리가 좋아도 노력하지 않고 하늘만 쳐다보는 것보다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는 터가 더 좋다. 남양주시 창현리에 조선 왕조 26대 임금인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석파(石坡) 이하응(李昰應·1820~1898)의 묘가 있다. 1898년 고양군 공덕리에 장사지냈다가 1966년 현재의 장소로 옮겨졌다.

    대원군이란 칭호는 조선시대에 왕위를 계승할 적자손(嫡子孫)이나 형제가 없어 종친 중에서 왕위를 이어받을 때 신왕의 생부에게 주던 존호(尊號)이다. 조선 역사상 대원군은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 인조의 아버지 정원대원군,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4명이 있지만 왕의 아버지로 왕이 즉위할 때 살아 있었던 사람은 흥선대원군이 유일하다. 흥선은 붕당 간 갈등과 국가 재정 파탄의 원인이 전국에 널리 퍼진 서원에 있다고 보고 중요 서원 47개를 제외한 모든 서원을 철폐시켰으며, 당백전과 원납전으로 원성을 샀다. 뿐만 아니라 격변하던 시기에 천주교도들을 박해하고 쇄국정책을 펴면서 국제관계 악화와 신문물을 받아들일 기회를 놓쳤으나 집권 초기에는 개혁정치와 왕권을 강화시킨 것은 사실이다. 1898년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흥선대원군 묘는 용맥이 좌우의 계곡과 뚜렷이 구별될 정도로 단정한 형상을 하고 좌우로 요동을 치면서 힘차게 내려오지만 결정적으로 묘 앞에서 멈추지 않고 너무 급하게 내려간다. 경사가 심하다는 것은 묘가 있는 곳에 멈추지 않고 생기가 계속 흘러내려간다는 뜻이다. 좌청룡과 우백호는 바깥으로 벌어져 새는 기운을 막지 못하고 있지만, 안산은 적절한 높이의 나무가 그 역할을 하고 있으며 묏자리는 암석이 없는 무해지지의 터이다. 김육과 흥선대원군은 비록 동일 시대에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가문을 일으켰으며 개혁정치를 실시했고 비슷한 나이에 사망했으며 무해지지의 묘에 안치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반면 김육이 백성들의 평안한 삶을 위해 끊임없는 노력으로 결실을 이루었다면 흥선은 권력욕에 사로잡혀 국가와 백성의 삶을 힘들게 했다.

    주재민 화산풍수지리연구소장

    (화산풍수·수맥·작명연구원 055-297-3882)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