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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설 50년 마산자유무역지역, 희망 품고 다시 뛰자] (2) 창설부터 구조 고도화까지

마산이 쌓아올린 수출의 꿈, 고도화로 키워갈 재도약 꿈

  • 기사입력 : 2020-01-07 20:5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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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0년 1월 1일 수출자유지역 설치법 공포로 마산자유무역지역이 태동했다. 이듬해 1호 입주기업 신화전공이 본격 가동하면서 수출 한국의 염원이 마산에서 꽃폈다. 반세기 역사의 마산자유무역지역은 기업과 노동자, 지자체, 유관기관, 지역민 등 다양한 주체가 고군분투해 만들어 낸 성과다. 특히 입주기업으로 구성된 ㈔마산자유무역지역기업협회는 든든한 지원군이자 동반자였다.

    협회 김정간(75) 상임고문은 1971년부터 지금까지 마산자유무역지역과 동고동락한 ‘산증인’으로 불린다. 협회 최원도(64) 상근부회장은 구조 고도화 사업을 이끈 주역이다. 이들에게 마산자유무역지역의 창설부터 구조 고도화까지 뒷이야기를 들었다.

    김정간 마산자유무역지역기업협회 상임고문이 마산자유무역지역관리원 2층 홍보관에서 자유무역지역 현황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전강용 기자/
    자유무역지역 현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김정간 마산자유무역지역기업협회 상임고문./전강용 기자/
    최원도 마산자유무역지역기업협회 상근부회장이 마산자유무역지역관리원 2층 홍보관에서 자유무역지역 현황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전강용 기자/
    최원도 마산자유무역지역기업협회 상근부회장이 마산자유무역지역관리원 2층 홍보관에서 자유무역지역 현황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전강용 기자/

    ◇1970년대 ‘산업기반 조성기’

    수출 확대, 국제수지 개선이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탄생한 곳이 마산자유무역지역이다. 정부는 당시 남해안 일대 8개 지역을 물망에 올렸고, 저습지와 해안 매립을 추진하던 마산이 적지로 꼽혔다. 마산보다 수년 앞서 대만의 가오슝(高雄)에서는 이미 자유무역지역 설치 작업이 한창이었다. 당시 일본 등 외국인투자기업이 대만보다 마산을 선택하게 된 데는 1969년 닉슨 미국 대통령의 대아시아 정책인 ‘닉슨 독트린’이 큰 몫을 했다고 김정간 고문은 설명했다.

    “마산은 운이 좋았습니다. 69년 닉슨 독트린이 발표됐는데 미국이 냉전체제를 종식하고 중국과 핑퐁 외교를 통해 대만을 배척시켰죠. 일본, 미국을 비롯한 외투 기업들이 대만으로 가지 못하고 마산으로 몰리게 되는 행운을 맞이했죠.” 당시 한국은 낮은 임금과 우수한 노동력이라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활발하게 진행된 공장 새마을 운동이 외투 기업에 은연중에 소문이 났다고 한다. 조성 3년째를 맞은 1972년 70개 업체가 입주 신청을 할 정도로 활기를 띠었다.

    1971년 4월 마산수출자유지역 건설현장을 시찰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마산자유무역지역관리원/
    1971년 4월 마산수출자유지역 건설현장을 시찰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마산자유무역지역관리원/

    ◇1980년대 ‘성숙과 시련 극복기’

    지표상 호황은 2008년이지만, 실질적인 호황은 1980년대 후반이라고 김 고문은 기억했다. 노동자를 구하기 힘들어 인사 담당자들은 버스를 타고 의령, 함안, 합천 등지를 돌며 고등학교를 중심으로 구인에 나섰다. 마산에서는 사람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규모가 큰 업체는 사람 한 명을 소개해주면 현금으로 1만원을 준다고 할 정도였죠. 그만큼 80년대 수출경기가 좋았어요.”

    1988년 수출액은 17억 달러를 넘겼고, 고용 인원은 3만명을 넘었다.

    자유무역지역의 고용 유발 효과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바로 ‘역외 가공업체’라고 김 고문은 설명했다. 당시 역외 가공이 활발하게 진행돼 자유무역지역 밖도 활기를 띠었다고 한다. 1988년 기준 역외 가공업체는 525개였고 이들이 고용한 인원만도 1만6600여명으로 집계된다. 업체에 130여명의 기술 인력이 파견되면서 기술 전수가 동시에 이뤄졌다고 김 고문은 설명했다.

    80년대 말에는 노동운동도 활발했다. 이전까지 수출자유지역 설치법에 따라 사실상 노동조합을 설립할 수 없는 구조였다. 1986년 법 개정이 이뤄졌고 1987년 6·29 민주화 선언 이후 노조 설립 운동이 들불처럼 번졌다. 1년 새 약 40개의 노조가 생겨났다.

    “노동권 확보라는 시대적 사명과 법 개정이 맞물리면서 80년대 후반 엄청난 노사분규가 있었어요. 그때 대표적으로 문을 닫은 업체가 한국수미다전기와 한국TC전자였죠.” 협회에서는 노사갈등 해결을 위해 토요대강좌를 운영해 노사 관계 중재에 나서기도 했다.

    1989년 마산수출자유지역 민주광장에서 마창지역 근로자 2000여명이 89임투완전쟁취 및 TC위장폐업 규탄대회를 가졌다./경남신문DB/
    1989년 마산수출자유지역 민주광장에서 마창지역 근로자 2000여명이 89임투완전쟁취 및 TC위장폐업 규탄대회를 가졌다./경남신문DB/

    ◇1990년대 ‘산업구조 조정기’

    1990년대 전국을 뒤흔든 것은 1997년 외환위기, 이른바 ‘IMF 사태’였다. 그러나 마산자유무역지역은 위기 속에서 빛을 냈다. 김 고문은 1990년부터 1999년까지 마산자유무역지역이 국가 전체 무역수지흑자액 133억 달러의 65%인 86억 달러를 달성하면서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고 강조했다.

    “국내 기업들 모두 죽을 판이었는데 마산에서는 무역 흑자가 났죠. 표정 관리를 못 할 정도였습니다. 자유무역지역은 ‘그린필드 투자’ 방식으로 부지만 제공하고 각 기업이 스스로 외화를 가지고 들어오니까 위기 속에서도 선전할 수 있었죠.”

    90년대는 인건비와 요소 비용이 상승하면서 노동집약적 산업이 큰 타격을 받았다. 마산도 예외는 아니었다고 김 고문은 설명했다. “90년대 인건비가 싼 중국으로 동광, 삼미 등 기업들이 많이 이전했어요. 세계적인 추세였지요. 결과적으로 마산에 남은 기업들이 나름대로 경쟁력을 확보했고 기술 개발, 제품 개발 등에 집중하게 됐어요.”

    1990년 당시 마산수출자유지역 노동자들의 출근 모습/마산자유무역지역관리원/
    1990년 당시 마산수출자유지역 노동자들의 출근 모습/마산자유무역지역관리원/

    ◇2000년대 ‘고도 성장기’

    2006년 3공구가 준공됐고, 2008년 마산자유무역지역의 수출액은 50억 달러를 넘어섰다. 노키아의 역할이 컸다.

    노키아티엠씨는 미국과 핀란드의 합작기업인 Tandy Mobira 시절인 1986년에서 1993년까지 판매량(수출량)은 7.5배, 생산량은 25배 증가했다. 노키아가 100% 투자한 시기인 1993년에서 2002년까지 판매는 20배, 생산량은 36배 늘었다. 노키아티엠씨는 2001년 결산기준일 기준 무려 3조4700억원대의 매출액을 기록했다. 지역경제는 물론 한국 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노키아가 담당했다는 평가도 나왔다. 노키아의 호황으로 수출액이 급등했지만 내부에서는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고 김 고문은 회상했다.

    “노키아는 80년대 입지가 미미했지만 10년간 엄청난 성장을 이뤘죠. 마산 수출의 80%를 차지할 때도 있었어요.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죠. 노키아가 철수하면 공동화 현상이 일어나니까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도 협회 차원에서 나왔어요.”

    2007년 1월 노키아TMC 노동자들이 부품을 조립하고 있다./전강용 기자/
    2007년 1월 노키아TMC 노동자들이 부품을 조립하고 있다./전강용 기자/

    우려했던 상황은 수년 내에 터졌다. 노키아는 2014년 마이크로소프트사가 한국공장 인수 배제를 결정하면서 마산에서 철수했다. 지역사회에서는 외투 기업 철수에서 발생하는 고용불안 등 문제의 해법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2010년~ ‘재도약 기반 구축기’

    창설 40년이 지나면서 시설은 노후화됐다. 표준공장에는 비가 샜고, 화물용 엘리베이터도 없었다. 협회 최원도 상근부회장은 2007~2011년 산업통상자원부 마산자유무역지역관리원장으로 근무하며 구조 고도화 사업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취임 후 김정간 상임고문이 ‘자유무역지역 발전방안’이라는 연구 보고서를 당시 최원도 원장에게 건넸고, 보고서에는 마스터플랜, 예산 확보 방법 등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고 한다.

    2010년대 항공 촬영한 마산자유무역지역 전경/경남신문DB/
    2010년대 항공 촬영한 마산자유무역지역 전경/경남신문DB/

    “제가 별도로 기획하지 않아도 될 만큼 보고서 내용이 탄탄했어요. 계획대로만 된다면 자유무역지역이 크게 재도약할 수 있다고 판단했죠. 그러던 차에 산업부에서 자유무역지역지정 공고라는 고시가 떴는데, 마산은 해당이 안 됐어요. 천신만고 끝에 유권해석을 받아 표준공장의 면적이 늘어나는 것도 대상에 포함된다는 통보를 받고 사업비를 확보해 구조 고도화가 시작됐어요.”

    2009년부터 2016년까지 구조 고도화 1·2단계 사업과 기반시설확충사업에는 국·도·시비 2513억원이 투입됐고 표준공장 재건축, 주차빌딩, 삼호천변 도로확장, 단지 내 도로정비 등이 이뤄지면서 지금의 마산자유무역지역이 완성됐다.

    최 부회장은 산업부 정년 퇴임 후 2018년부터 협회 상근부회장을 맡아 자유무역지역의 현안을 다루고 있다. 원장 부임 당시 하지 못했던 일들을 이루기 위해서다. “1980년 상공부 직원으로 마산에서 첫 근무를 한 지 40년이 넘었어요. 마산자유무역지역은 아직도 정성을 많이 기울여야 하는 곳이죠. 앞으로 강소기업 발굴, 기술 개발 등 발전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곳입니다.”

    박기원 기자 pkw@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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