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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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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진정한 힐링- 김종광(소설가)

  • 기사입력 : 2019-12-12 20:4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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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별 생각 없이 리모컨을 돌린다. 유독 자주 나오는 프로가 있다. 동시에 무려 다섯 개 채널에서 나온다. 하도 자주 나오니 조금이라도 보지 않을 수 없다. 드라마처럼 연속성이 없으니 부담도 없다. 이런 일이 몇 차례 반복되면 내가 자주 보는 프로그램이 된다. 나처럼 그 프로를 ‘자주 본다’는 분을 꽤 만났다.

    보면서도 스스로 이해가 안 된다. 대체 왜 저것을 보고 있는 건가? 도대체 재미라고는 있을 수가 없잖은가. 출연자는 달랑 두 명뿐이다. 예능인이 산속에 홀로 사는 나이 든 남성(아주 가끔 여성도 있지만)을 찾아가 2박 3일을 보낸다. 산속사람만 달라질 뿐 대동소이하다. 나물이나 약초나 버섯을 채집한다. 나무를 하거나 오르거나 옮긴다. 밭에 무엇을 심거나 풀을 맨다. 잡거나 낚시하거나 사냥한다. 그리고 푸짐하게 먹는다. 샤워라고 말하면 적당하지 않은 것 같은 목욕신도 툭하면 나온다. 산속인의 기이한 언행? 독특하시다는 것 말고 무슨 느낌을 가져야 되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그분들이 날것 연기를 참 잘한다는 생각을 가장 많이 했다. 자연 풍광의 아름다움? 글로벌한 자연이 등장하는 프로들에 비하면 참 소박한 풍경이다.

    모든 힐링(치유)을 표방하는 프로그램의 짜깁기 축약판이라고 할 수 있다. 소위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현대인들에게 힐링과 참된 행복의 의미를 전하는 프로그램’들 말이다. 세계를 찾아다니는 글로벌여행으로 유명한 두 프로그램도 3분의 1은 오지를 찾아다닌다. 세계의 오지에서 산속인과 비슷한 이들을 만난다. 무수한 ‘먹방’ 프로와도 궤를 같이한다. 밥해 먹는 장면만 떼어 보면 ‘세끼’류와 판박이다. 시골 가서 시골 사람 만나는 ‘고향’류와도 크게 다를 것 없다. 산속인이 힘든 일을 할 때는 ‘체험’류를 방불케 한다. 시련 이야기가 꼭 나오니 ‘인생’류와도 상통한다. ‘동물’류 예능과 비슷한 장면도 적잖다.

    숱하게 제작, 방영되었던(중인) 소위 ‘힐링’ 프로의 클리셰(진부하거나 틀에 박힌 장면)만 모아 가장 저렴하게 만든 듯하다. 그러니까 방송인들이 말하는 힐링은 ‘시골 가서 맛있는 거 해 먹고 일도 좀 하고 놀다가 이야기하는 것’이다.

    ‘자주 본다’는 자체가 착각이 아닐까. 여러 채널에서 무수히 재방송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을 보고자 하는 시청자가 많아서 그것이 자주 나오는 게 아니다. 실은 돈 문제. 무수한 채널은 자체 제작으로 24시간을 채울 수 없으니 저렴한 프로를 사다가 수시로 틀어줘야 한다. 그처럼 저렴한 콘텐츠는 없을 테다. 싸게 만든 것이니까 싸게 사서 마구 틀 수 있다.

    연출된 촬영과 선정적 편집과 그에 따른 조작 의혹과 비판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조작이든 왜곡이든 사실이든, 아무튼 ‘힐링’류가 시청자의 마음을 자극한다면, ‘자연에서의 삶’에 대한 동경 때문일 테다.

    사람은 문득문득 꿈꾼다. 사회와 사람들로부터 자유로워져, 심지어 가족으로부터도 자유로워져, 무인도 같은 곳에서 홀로 유유자적 살고 싶다. 구차하고 궁색하면서도 구속되지 않고 평안하게 즐기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그런 삶은 도시에서는 불가능할 것 같고 오로지 자연에서만 가능한 것 같다! 그래서 힐링 프로는 자연을 찾아간다. 그런 동경은 말 그대로 동경일 뿐이다. 현대인의 생존필수품(스마트폰, 텔레비전, 컴퓨터, 자동차 등)이 없는 자연 상황에서 하루 이상 안빈낙도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하기 때문에, 대신해주는 방송이라도 본다. 그런데 나는 정말 ‘힐링’하고 있는 걸까? 하고 있다고 그저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지난한 삶에 즐거움과 감동과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힐링일 테다. 대부분의 사람이 ‘힐링’하지 못하는 건 자연에 못 가서가 아니다. 끝없이 가난하고 힘이 없고 끝없이 노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휴식이 불가능하다. 굳이 자연을 찾아다니는 것도 좋겠지만, 차라리 책하고 노는 게 진정한 힐링일 테다. 독서는 노동을 멈추게 하고, 마음만은 특권층·부자로 만들어주니까.

    김종광(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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