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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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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파] ‘공순이’- 김진호(경제부 부장)

  • 기사입력 : 2019-10-01 20: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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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나라의 지난해 수출은 6055억달러 규모였다. 우리나라가 수출 1억달러를 돌파한 것은 1964년이다. 1967년에 3억달러, 1970년에 와서는 국민이나 언론에서 아무도 달성할 수 있으리라 믿지 못했던 10억달러를 수출해 냈다. 우리나라 수출신화 뒷면에는 과거 ‘공순이’로 불린 여성근로자, 즉 여공(女工)들이 있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는 ‘식순이’라 불린 식모와 ‘차순이’라 불린 버스안내양과 더불어 여공인 ‘공순이’들의 전성시대였다. 1960년대 우리나라 인구 총 65%가 농촌에 살았다. 농가의 자식은 보통 5~6명인데 그중의 절반이 딸이었다. 당시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가사를 돕다가 식량사정이 더욱 어려워지면 도회지로 나와 버스안내양을 하거나 아니면 공장에서 일했다. 방직공장 등에 취직한 여공들은 적은 월급을 절약해서 남동생이나 오빠의 학비를 대고, 약간의 저축도 했다.

    ▼여공들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산업체 부설학교가 등장하면서다. 1976년 구로공단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어린 여공의 손을 잡고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자 “또래처럼 교복 한번 입어보고 싶다”고 대답했다. 감정이 북받친 박 대통령은 “법을 뜯어고치고 절차를 바꿔서라도 공단 아이들에게 똑같은 교육 기회를 주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1977년 산업체 부설학교가 생겨났다. 앞서 1974년 마산에서는 한일합섬 부설 한일여자실업고교가 설립됐다.

    ▼우리나라 수출의 요람이었던 마산자유무역지역(전 마산수출자유지역)이 내년이면 설립된 지 꼭 50주년이 된다. 여공들이 수출자유지역과 한일합섬, 공단에서 흘린 땀과 눈물을 빼고 대한민국의 산업화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여공들은 잊혀 버렸다. 이에 이름 없는 영웅들을 기리는 작은 기념사업이라도 했으면 한다. 수기 공모전이면 더욱 좋겠다. 누가 알겠는가? 일본 열도를 눈물바다로 만든 구리 료헤이의 ‘우동 한 그릇’보다 더 심금을 울리는 작품이 나올지.

    김진호(경제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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