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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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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공간 (35) 창원 성산패총

창원의 번영·추억 간직한 ‘도심 속 오아시스’
1973년 창원공단 조성과정서 전복·대합·소라 등 패총 더미 발견
기원전 1000년 선사시대 유물 발견

  • 기사입력 : 2019-06-20 20:5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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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무 가까이 있어서,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그래서 잊고 있었던 그곳. 사람들은 늘 스쳐 지나갔지만, 그곳은 45년 동안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창원에서 국민학교 소풍의 추억으로 남아 있는 창원 성산패총은 창원공단 속에서 1970년대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1974년 11월 2일 국가문화재인 사적 제240호로 지정된 이후 실제로 바뀐 것이 없다. 왠지 소중함이 더 느껴지는 대목이다. 혹자는 성산패총을 첨단기계산업공단 가운데 있는 ‘오아시스’라 불렀다.

    창원시 성산구의 성산패총. 패총은 선조들이 먹고 버린 조개껍데기가 쌓인 조개 무더기 유적이다.
    창원시 성산구의 성산패총. 패총은 선조들이 먹고 버린 조개껍데기가 쌓인 조개 무더기 유적이다.

    창원시 성산구 성산패총로 137(외동 853-7)은 야산이다. 야산의 이름이 성산이고, 그 성산 전체에 조개더미가 발견돼 성산패총으로 이름 붙였다.

    성산패총에는 성산 제일 위쪽(공단 도로 기준 높이 49m)에 성산패총유물전시관, 야철지가 있다. 또 성산패총과 연관은 없지만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인 용화전 석조여래좌상이 있고, 400m가량 되는 석축 형태의 성곽이 있다. 성산패총은 느티나무, 참나무, 대나무, 잔디밭 등 오래된 고목들을 포함해 면적 5만4230㎡(1만6400여평)이 있는 성산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명칭이다.

    창원시 성산구의 성산패총.
    창원시 성산구의 성산패총.

    성산패총유물전시관에 들어서기 앞서, 머리 아프지만 한반도의 인류 등장을 되새겨본다.

    선사시대(先史時代)는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로 나뉜다. 문자가 존재하지 않아 물건과 건축물 등으로 알 수 있는 시대이다. 그 이후는 역사시대로 삼한시대, 삼국시대 등으로 이어진다.

    성산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은 삼국시대로 추정된다.

    성산패총 내 유물전시관.
    성산패총 내 유물전시관.

    곽현숙 창원시 문화관광해설사는 “삼국시대에 성이 만들어졌고, 성이 있는 산이라 해서 성산으로 불렀다”고 설명했다.

    이때 지어진 이름은 현재 성산구청의 성산(城山)과 같다.

    여기서 발견된 패총은 한참 이전인 선사시대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1973년 창원공단(기계단지) 조성 과정에서 성산 일대 터파기 작업 중에 패총이 발견돼 1974년 2월부터 5월까지 문화재관리국을 중심으로 합동발굴팀이 조사를 했다. 패총에는 전복, 대합, 소라 등 껍데기뿐만 아니라 당시 생활용품들도 발견됐는데, 그 시기는 청동기 시대의 것으로 확인했다. 기원전 1000년이다.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 나왔다고 해서 성산패총의 생성을 같은 시기로 단정할 수는 없다.

    창원 역사의 시작은 패총을 보면 알 수 있다.

    대부분 정착을 하고 살기 시작한 신석기 시대로 볼 수 있다. 창원에는 합산패총, 성산패총, 가음정패총, 내동패총, 외동패총, 사화패총, 소답동패총, 남산패총 등 8개의 패총이 발견됐다. 이 중 현재 눈으로 확인이 가능한 곳은 성산패총과 남산패총이 유일하다. 대부분 패총에는 청동기 시대 유물이 나왔는데, 동읍 주남저수지에 형성된 합산패총만 유독 빗살무늬토기 등 신석기 시대 유물이 출토됐다. 이에 대한 명확한 설명은 없다. 다만 창원지역에 나온 패총은 모두 형성 시기가 다를 리가 없었을 것이고, 합산패총을 제외한 곳에서 신석기 시대 유물이 발견되지 않은 것은 유물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곽현숙 해설사는 “신석기 시대에 동읍에서만 사람이 정착해 살았겠는가. 그 시대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때 이곳에 사람이 살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창원지역 여기저기서 정착하고 살았을 것이다”고 말했다.

    성산패총유물전시관은 2층 규모에 철기류, 토기류, 골각류, 석기류, 청동기류, 주화 등 1290점을 갖고 있다. 조개껍데기는 사실 볼 수 없다. 그 속에 함께 묻혀 있는 유물들만 전시하고 있다. 성산패총 문화재 지정 4년 후인 1979년에 완공된 이후 구조적으로 바꾼 게 없어 요즘 아이들에게는 외면받을 만하다. 2층 안쪽에 중국과 대외교류를 입증하는 화폐가 눈길을 끈다. 한나라 ‘오수전’인데 성산 성곽에서 발견됐다. 당나라 ‘개원통보’도 발견됐는데 현재 여기에 없었다. 이날 확인 결과 창원역사민속관에서 보관 중이라는 것을 새롭게 알았다.

    복잡한 유적 이야기를 끝내고 전시관 밖으로 나가 성곽으로 갔다. 삼국시대 돌로 쌓은 석성인데, 어릴 적 촌동네 담벼락 느낌이다.

    곽현숙 해설사는 “외부 침입 목적도 있을 것이고, 일반 주거 목적도 있을 것이다”고 추정했다. 성곽을 싸고 있는 대나무들은 패총이 발견되기 이전부터 성산을 지켜온 터줏대감 자연림이다.

    성산패총 내에 삼국시대 축조된 것으로 확인된 성곽.
    성산패총 내에 삼국시대 축조된 것으로 확인된 성곽.

    조금 걸어가면 크다란 느티나무 아래, 사연을 알 수 없는 불상이 나온다. 용화전 석조여래좌상으로 1972년 2월 도 문화재로 지정됐다. 불상은 불신·광배(光背)·대좌(臺座)를 모두 갖추고 있는 석굴암 본존불 양식을 계승한 신라말 고려초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창원시 소탑동(현 소답동) 한 암자가 1984년 도로 개설로 편입되면서, 불상이 성산패총으로 옮겨졌다. 누가, 어떻게, 왜 여기로 옮겼는지 기록은 없다.

    성산패총을 관리하고 있는 이형우 씨는 “당시 암자 스님이 불상을 어디다 옮겨야 할지 고심하다 성산패총이 사적이라 안심이 되니까 갖다 놓은 게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시멘트로 보수한 꺼멓게 된 머리가 한없이 애처롭다.

    야철지로 향하는 길. 1만5000㎡ 잔디와 고목들의 바람 스치는 소리가 상쾌하다. 70년대 중반을 시작으로 특히 80~90년대 단골 소풍 장소로 창원과 마산, 진해지역에서 온 어린이들이 이곳을 가득 메워 김밥을 먹고 놀이를 했던, 시끌벅적거림이 상상 속으로 들린다.

    이형우 씨는 “40~50년 전 창원기계공단이 조성되기 전에 성산패총 주변에 살았던 원주민들이 옛날 추억이 그리워 자주 방문하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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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산패총 내에 있는 용화전 석조여래좌상(도지정 문화재 제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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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산패총 내 야철지와 패각층. 야철지는 철을 생산하기 위해 사용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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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산패총 내 유물전시관에 전시 중인 삼한시대 유물.

    야철지(冶鐵址)는 철기 시대에 창원에서 이미 철을 생산하고 유통했다는 것을 추정하게 한다. 등록된 유적지는 아니다. 철기 문화는 노(爐.용광로)에서 철광석 등을 녹여 아래 흙틀(거푸집)로 흘러 보내 굳히는 방식으로 생활에 필요한 철 도구를 만든다. 성산패총 야철지는 용광로는 없고 다만 흙틀로 추정되는 유적만 남아 있다.

    곽현숙 해설사는 “야철지에서 철 성분은 많이 발견되면서 철 생산과 관련된 작업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확실한 입증은 없다”고 설명했다.

    최근 성산패총이 주말 방문객으로 다시 시끌벅적거리고 있다. 입구에서 만난 창원시 문화유산육성과 옥광수 씨는 “최근 3~4주 동안 주말에 1000여명이 찾아오고 있다”며 “옛 추억이 있는 분들도 있고, 대구 등 타 지역에서 찾아오는 분들이 있어 너무 바쁘다”고 말했다.

    성산패총 역사만큼이나 오래돼 보이는 커피자판기가 입구에서 눈에 띈다. 한 잔 300원짜리. 빛바랜 커피자판기는 누구 하나 유혹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계속 물을 데우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깊숙이 들여다보지 않았던, 창원역사와 함께한 성산패총의 이야기에 여태껏 그렇게 무심했나 하는 뭉클함이 밀려온다.

    곽현숙 해설사는 “70년대 만들어진 성산패총이 변한 게 없어도 너무 없다. 봄, 가을에 초·중학생들이 현장학습을 위해 찾아오는데 추억이 될 만한 게 없다. 오래전처럼 좋은 추억을 가져갈 수 있도록 깊이 있게 업그레이드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글= 김호철 기자 keeper@knnews.co.kr

    사진= 김승권 기자 skkim@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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