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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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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가지런한 침묵- 박영기(시인)

  • 기사입력 : 2019-06-13 20: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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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발은 내가 어딜 가든 나와 함께 한다. 일상에서 일탈로 이동했다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때 함께 돌아온다. 일탈과 일상을 반복하는 나와 항상 함께 한다. 나는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무작정 집을 나선다. 터미널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출발하는 버스를 탄다. 통영행이다. 여객선터미널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출항하는 배를 탄다. 한산도행이다.

    바닷물을 가르는 뱃머리. 뱃머리에 부딪치는 바닷물 소리와 엔진소리. 출렁거리는 물마루에 튕겨 올라 빤짝이는 햇빛. 수면을 무대로 탭댄스 추는 햇살. 가슴을 후련하게 뚫고 지나가는 바람. 한산도는 푸르다. 온통 푸르다. 유월이니까 짙푸르다. 푸르른 바다와 푸른 숲을 끼고 걷는다. 솔잎 사이를 빠져나가는 바닷바람 소리. 호랑지빠귀 울음과 검은지빠귀 울음소리. 그리고 자박자박 내 신발과 흙길이 만나는 소리.

    발끝을 내려다보면 나타났다 사라지는 왼발 오른발. 오른발이 나타나면 왼발이 사라지고 왼발이 나타나면 오른발이 사라진다. 오른발이 앞으로 나아가면 왼발이 뒤로 물러나고, 왼발이 나아가면 오른발이 물러난다. 어느새 숲으로 둘러싸인 제승당. 내 발걸음은 수루 쪽으로 향한다. 오른발이 앞서가면 왼발이 따라오고, 왼발이 앞서 가면 오른발이 뒤를 따른다.

    수루에 서 있는 중년 남자. 사람인지 수루 기둥인지 미동도 하지 않는다. 고위직위나 사무실에 어울림직한 복장을 하고 여기 온 까닭이 무엇? 오늘 같은 평일 오전 혼자서, 왜? 정리해고된 걸까, 사업이 부도났을까, 아니면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까? 내 유추는 하염없고 남자는 바다를 향해 하염없다. 고독한 남자의 고요를 방해하지 말고 수루에서 떠나자. 오른발이 첫 계단을 내디디면 다음 계단을 내딛는 왼발. 오른발이 그다음 계단을 내디디려다 멈칫, 다시 내딛는다.

    계단 밑에 낡은 갈색구두 한 켤레. 몇 차례나 신고 벗고 했을까? 수천 번, 아니 수만 번? 발에 쓸린 구두 속이 군데군데 헐어 있다. 발꿈치와 발가락이 닿은 부분은 땀에 절어 검게 물이 들어 있다. 체중을 받아내느라 바닥은 꺼져 있다. 구두는 서서히 길든 말처럼 본래 형태를 버리고 주인의 발 모양대로 변형되었다. 시간의 궤적이 주름주름 깃들어 있다. 주인의 비밀한 삶을 모두 발설할 것처럼 입 벌리고 침묵하고 있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가지런한 침묵이다.

    ‘좌우가 바뀌거나 이쪽저쪽 외면할 수도 있었을 텐데/ 참 얌전히도 줄을 맞추고 있다/ 가지런한 침묵이야말로 침묵의 깊이라고/ 가지런한 슬픔이야말로 슬픔의 극점이라고/ 신발은 말하지 않는다’ - 강연호 「신발의 꿈」

    ‘가지런한 슬픔이야말로 슬픔의 극점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가지런하고 슬픈 구두를 생각한다. 모든 아버지들의 구두. 고군분투하는 아버지들과 함께하는 구두. 매일 아침 현관문을 나서기 전에 끈을 조이며 결의를 다졌을 아버지. 아버지는 인간이기 때문에 외로움을 짊어지고 시간의 극점을 향해 걷고 또 걸어야 했다(한다). 구두 또한 구두이기 때문에 인간의 무게를 짊어지고 감당해야 했다(한다).

    ‘신발은 제 몸을 추슬러 버티고 있다’ (강연호 「신발의 꿈」) 낡은 갈색구두는 남자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남자가 마음을 추스르고 돌아와 신을 때까지, 다시 출발할 때까지, 남자의 심장박동에 맞추어 경쾌하게 리듬을 탈 때까지, 구두는 마냥 가지런하게 침묵하고 있다. 남자가 어딜 가든 함께 할 구두는 한없이, 하염없이,

    박영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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