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08월 23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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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인권변호사 박미혜 씨

“나는 약자와 공익과 정의의 편”

  • 기사입력 : 2019-05-09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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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년 7월의 마지막 날, 온 세상이 폭염에 녹아내릴 것 같은 오후였다. 그리고 4대강 사업 함안보 공사장 내 환경운동가 두 명의 고공농성이 10일째 이어지는 중이었다. 이날 40m 높이의 고공 농성장으로 올라간 한 여성 변호사가 있었다. 그는 20여 분간 농성자들을 면담하기 위해 크레인 아래서 1시간이 넘게 싸워야 했다. 경찰이 안전상의 이유로 입회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땡볕 아래의 긴 대립 끝에 그는 2명의 의사만 동행한 채 크레인에 올랐고, 고립돼 있던 농성자들은 10일 만에 외부와 접촉할 수 있었다. 당시 ‘변호인 접견권’은 합법적으로 농성자들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왜소한 체구의 그가 위태롭게 올라오는 모습을 본 농성자들이 오히려 철탑을 3분의 1쯤 내려와 그를 맞이했다. 법무법인 믿음의 대표이자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하 민변)’ 경남지부장 박미혜(41) 변호사의 이야기다.

    박 변호사는 그때나 지금이나 40m 타워크레인에 오르던 그 모습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늘 경남에서 발생한 공익 사건의 중심에 서서 정의를 외치고 투쟁한다. 경남의 대표적 공익 변호사로 활약하고 있는 박 변호사를 지난 8일 법무법인 믿음 사무실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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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미혜 변호사가 창원시 성산구 법무법인 믿음에서 인권변호 활동에 대한 소회를 밝히고 있다./김승권 기자/

    ◆지역 이슈의 중심에는 그가 있다

    ‘2007년 마산 수정산단 반대위, 2010년 4대강 사업 반대위, 2012년 부마항쟁 피해자 첫 손해배상 소송, 2013년 진주의료원 휴폐업 불법 소송, 2014년 하동 국민보도연맹 소송, 2017년 거제 삼성중공업 크레인 참사 대책위, 2018년 창원대동백화점 노브랜드 입점 반대 대책위, 창원출입국외국인사무소 외국인 유학생 폭행 사건’. 박 변호사가 창원에 온 2007년부터 지금까지 맡았던 사건들이다. 사건의 면면만 살펴봐도 도내 굵직한 사회적 이슈의 중심에 그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결과가 좋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가 매 순간 공익과 약자의 편에서 싸우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솔직히 처음에 사명감보다는 할 사람이 없어서 하게 됐어요.(웃음) 2003년 변호사가 되면서 민변에 가입했고 서울에서 활동하다 2007년 창원에 오게 됐는데, 경남에서는 공익 사건을 맡을 민변 활동이 너무 미미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할 일들이 많았던 거죠. 게다가 제가 성격까지 급해서 시민단체 등에서 요청이 왔을 때 답을 빨리 주기도 했고요.”

    이러한 그의 활동은 그가 추구하는 변호사의 가치와도 부합한다. “고루하고 식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변호사의 기본 덕목은 정의감인 것 같아요. 어려운 법을 일반 국민의 입장에서 대변해 줄 수 있는 대표적인 사람이 변호사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같은 법을 보더라도 변호사는 판사나 검사와는 다른 시각, 즉 정의로움에 대한 감수성이 있어야 하죠. 그래서 정의관념에 부합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하는 법에 대해서는 잘못됐다고 지적해 줄 수 있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노동자의 딸이 공익 변호사가 되기까지

    어린 시절부터 그는 법조인을 꿈꿨다.

    “법조인이 돼서 약자를 돕겠다는 거창한 생각은 아니었어요. 그저 ‘나는 억울한 일은 당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이 일의 출발점이었죠.(웃음) 저는 아이 셋이 있는 창원공단의 블루칼라 집안에서 자랐어요. 집안 경제사정이 넉넉하지 못했는데, 초등학교 시절부터 이 때문에 차별받는 일들이 있었어요. 내가 학업성적이 더 우수한데 우수상을 집이 부자인 다른 친구에게 준다거나 하는 일이죠. 그때 제가 많이 삐딱해져버린 것 같아요.”

    모범생이었던 그는 1997년 고려대 사범대에 입학했다가 다음해 다시 연세대 법학과에 들어갔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데모하는 대학생들이 빨갱이라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믿었어요. TV를 보면서 저 언니오빠들은 왜 저럴까 생각했죠. 그런데 대학에 와서 보니 그들은 아주 평범한 선배이자 친구들이었어요. 문화적 충격이 컸고, 법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법학과에 다시 입학해 노동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고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그 결과 그는 민변 소속 변호사가 됐고, 지금은 경남지부장까지 맡고 있다. “민변은 저 개인적으로는 제가 변호사를 하게 된 이유이자 롤모델이었어요. 그리고 저는 민변을 법조계의 소금이자 법률과 법률 시스템의 감시자라고 생각해요. 물론 지금은 이러한 생각들이 또 하나의 ‘선민의식’이나 ‘기득권’이 될 수도 있겠지만 최근 민변의 활동을 보면 건강하게 변화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도내 최초로 민변으로 구성된 ‘법무법인 믿음’을 만들었다.

    “공익변호는 수익이 안 될 뿐더러 불필요한 오해에 휘말릴 수도 있거든요. 이전에 4대강 소송단으로 참여했을 때 갑자기 사무실로 경찰 정보과에서 나왔어요. 사전에 연락도 없었죠. 그리고는 대뜸 이것저것 물어보는데, 같은 사무실을 하는 변호사님들에게 민폐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됐어요. 그래서 민변들로 구성된 사무실을 제가 만들었어요. 먹고살아야 하니까 공익을 전담으로 하는 사무실로 운영되진 않아요. 다만 기본 소송 외에 에너지 대부분을 공익변호를 비롯해 공익 활동에 쏟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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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 변호사가 사무실에서 변호를 준비하고 있다.

    ◆변호사 되겠다는 딸의 꿈은 반대

    그가 가끔 우스갯소리로 ‘변호사는 현대판 액받이’라고 말한다고 했다.

    “대단한 사건이 아닌 대부분의 소소한 사건들은 결국 의뢰인을 대신해서 싸워드리고 대립되는 상대방의 비난과 공격을 대신 받아내는 일을 하는 게 변호사예요. 그런데 가끔 아군이어야 할 의뢰인이 변호인을 공격하기도 해요. 그럴 때 참 힘이 많이 빠지죠. 그리고 망해 가는 지역주택조합에 발목 잡힌 사람들, 임대차보증금 못 받는 사람들, 파탄나는 가정들 등 그냥 함께 쪼그라들고 망해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을 때도 무력감에 힘이 들기도 하죠.”

    이는 그가 딸이 변호사가 되겠다는 꿈을 이야기했을 때 반대한 이유기도 하다.

    “변호사라는 직업은 매번 승패가 갈리는 직업인데 항상 이길 수가 없잖아요. 또 늘 사람들을 만나고 대하는 직업인데, 좋은 사람만 있지 않거든요. 그 정신적 스트레스를 이겨내는 일이 너무 힘들다는 걸 아니까 선뜻 응원하기가 힘들었어요. 딸에게 다른 일을 찾아보라고 권했어요.(웃음)”

    ◆경남지역 공익 변호인 풀단 구성이 희망

    사무실을 나서는데 법무법인 믿음 사무실 간판 아래는 ‘부설 공익인권센터’라는 글자가 눈에 띄었다. 박 변호사는 “지금은 없는데, 미래의 희망을 적은 것”이라며 “경남에는 인권과 관련된 이슈가 생겼을 때 각계 단체들을 통합해서 움직일 수 있는 컨트롤타워가 없는데 그러한 타워를 만드는 게 바람”이라고 말했다.

    또 그는 지역사회를 위한 도내 공익 변호사 네트워크를 구성하려는 계획도 세우고 있다.

    “경남에서 공익 소송을 소화시킬 수 있을 풀이 형성되면 좋겠어요. 실력있는 후배들을 키워서 같이 의논하고 또 서포트 역할을 해주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어떤 변호사로 기억되고 싶냐고 물었다. 이날 인터뷰의 시작점이 답으로 돌아왔다.

    “음…. 우리 지역에서 공익 소송을 제일 열심히 했던 변호사로 남고 싶어요.”

    조고운 기자 lucky@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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