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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칠천량 해전 전몰자 위령비 세우자- 이봉수(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장)

  • 기사입력 : 2019-01-10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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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제도와 그 부속섬인 칠천도 사이의 좁은 해협을 임진왜란 당시에는 칠천량이라 불렀다. 지금의 거제시 하청면 옥계리 일원이다. 1597년 음력 7월 15일(이하 날짜는 음력) 원균이 이끄는 조선수군이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받고 이곳 칠천량에서 처절한 패배를 당했다. 정유재란 발발과 동시에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고 서울로 압송되자,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은 적정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채 결전을 서두르다가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다. 1597년 7월 4일 원균은 도원수 권율의 명령을 받고 삼도수군의 주력을 총동원하여 180여 척의 전선을 이끌고 한산도를 출발하여 부산 방면으로 향하였다.

    7월 7일 다대포에서 적선 8척을 격파한 원균함대는 절영도 바깥바다까지 진출했다. 조선수군이 왜군의 대규모 함대를 발견한 후 쫓고 쫓기면서 풍랑과 싸우다, 노를 젓는 군사가 피로에 지쳐 전선이 분산되고 더 이상 전진하기 어렵게 되었다. 일부 전선이 서생포까지 표류하여 적에게 도륙을 당하는 사고도 발생했다. 녹초가 된 병사들이 후퇴하면서 가덕도에 올라 물을 마시고 있을 무렵 왜군이 기습을 가하여 노젓는 병사 400여명이 전사하자, 원균은 겨우 퇴각하여 7월 15일 오후에 가까스로 칠천량에 정박하였다. 이때 조선 수군은 풍랑과 싸우며 노를 저어온 관계로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한편 일본군의 토도 다카도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고니시 유키나가 등은 수군을 안골포에 집결시키는 한편 가덕성의 시마쓰 요시히로의 육군 3000명을 거제도에 상륙시켜 칠천량 연안에 포진시키는 등 수륙양면 기습작전을 준비했다. 드디어 7월 15일 아군의 경계가 소홀한 야음을 이용하여 웅천과 안골포의 대소 함선 600여 척을 동원해 기습을 감행하고, 거제도의 왜 육군도 대포를 쏘며 기습에 가세했다. 좁은 해협에서 서로 얽혀 접전을 벌였으니 당연히 혼전양상이 되고 왜군의 장기인 배에 기어올라 칼로써 승부를 거는 등선육박전술에 휘말려 조선 수군은 궤멸되고 말았다.

    이날 전투에서 조선수군은 배설이 갖고 전라도 방면으로 퇴각한 12척을 제외한 모든 전선을 잃고, 원균과 이억기 장군을 포함한 1만명 이상이 전사했다. 비운의 역사를 간직한 칠천량 언덕에는 그날의 패배를 기억하기 위해 ‘칠천량해전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지휘관의 잘못된 판단으로 수많은 병사들이 순국한 현장이자 조선수군의 유일한 패전지인 칠천량해전기념공원에는 영상관까지 갖춘 전시관이 잘 지어져 있다.

    그런데 이곳에 가면 항상 아쉬운 것이 하나 있다. 나라를 위해 순국한 무명의 조선수군을 기리는 위령비 하나 없는 것을 알면 마음이 편치 못하다. 다행인 것은 최근에 나라를 사랑하는 민초들이 뜻을 모아 위령비를 세우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서울여해재단(이사장 한국콜마 윤동한 회장) 이순신학교 교수진과 수료생들이 주축이 되어 모금운동을 벌일 계획이다. 경남 도민은 물론 전국의 나라사랑 민초들이 십시일반으로 동참해 주실 것을 간곡히 호소한다.

    이봉수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장)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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