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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8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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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시론] 인문과 무협의 공간에서- 김태희(다산연구소 소장)

  • 기사입력 : 2018-11-07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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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재소 교수가 이끄는 ‘중국인문기행’은 중국에 관한 나의 공간 감각을 확대시켜주었다. 중국의 남쪽 오·월 지역과 근대 중국근대사의 현장 광둥성을 다녀왔는데, 이번엔 서쪽으로 껑충 뛰었다. 바로 쓰촨의 청두였다. 바로 삼국지의 유비가 ‘촉한’을 건국하고 도읍으로 삼은 곳인지라 기대가 컸다.

    첫날 방문한 삼성퇴박물관은 이곳 지역에 독자적인 고대문화가 형성돼 있었다는 점을 보여줬다. 둘째 날 찾은 도강언은 오랜 역사를 지닌 수리시설이다. 그 옆에 덩샤오핑이 쓴 글씨 ‘조복만대(造福萬代)’가 눈에 띄었다. 수리사업이 만대에 이르는 복을 만드는 공업이라는 해석이리라.

    청두 일대를 돌아보며 이곳이 물산이 풍부한 천부지국(天府之國)임을 확인했다. 정치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란 것도, 그저 양강의 대립에서 쉽게 실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믿을 만한 것이 확보되지 않는다면 양강 속에 제3의 존재란 빈말에 불과한 것이다.

    여인 설도와 탁문군 이야기가 얽힌 곳을 찾아가고, 삼국지와 출사표의 주인공인 제갈량의 무후사를 방문하고, 소순·소식·소철의 삼부자의 사당인 삼소사를 찾아가 소식의 적벽부를 읊조리고, 두보가 머물렀던 두보초당을 들러 두시를 읊게 하는 것은 인문의 힘이었다.

    이번 여행의 절정은 10월의 마지막 날 방문한 아미산이었다. 버스와 케이블을 이용해 해발 3000m의 금정까지 올라갔다. 정상 입구에서는 원숭이들이 환영해주었다. 아래로 깊은 계곡이 보이고, 서쪽으로 멀리 흰 눈이 덮인 공가산이 보였다. 아미산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무협지적 상상력이 동했다. 필자가 영화 ‘반지의 제왕’을 보면서 이건 서구의 무협지가 아닌가 여겼는데, 권력을 둘러싼 여러 집단의 갈등과 제휴라는 이야기가 그렇지만, 영화를 찍은 뉴질랜드의 스펙터클한 광경이 무협지적 기분을 더했다.

    아미산은 익숙한 이름이다. ‘아미’는 무협지에 등장하는 문파의 하나이다. 필자가 무협지에 과문하지만 완전 문외한은 아니다. 마침 일행의 한 사람이 중국 무협지의 대가 진융(金庸)이 사망하여 검색어 순위에 올랐다고 귀띔해주었다. 그의 작품 <소오강호> 이야기는 참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강호의 일은 이름이 2할, 실력이 2할을 차지하고, 나머지 6할은 흑백 양도 친구들이 체면을 봐주는 데 의존해야 한다.” 첫 부분에 등장하는 이 대사는, 사람이란 결코 자신이 잘나서가 아니라 친구들의 도움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했다.

    소오강호는 인간성과 권력투쟁에 대한 통찰을 보여줬다. 영호충의 사부이며 정파인 화산파의 장문이었던 악불군의 진면목이 드러난 것은 참으로 극적이었다. 악불군의 별호가 군자검인 것은 하나의 위선이었던 셈이다. 규화보전이라는 절대무공의 비급을 얻기 위해 스스로 거세하는 것도 상징적이었다. 모두가 손에 넣고자 다퉜던 것이 실은 치명적인 것이었다. 탐욕이 자기 파괴로 이어지고, 권력욕이 배신으로 표출됐다.

    무협지에서 정파와 사파라는 선악의 대립이 기본 구도일 터이다. 그러나 소오강호에서처럼 현실에서는 선과 악을 행하는 주체가 그렇게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 일월교의 이야기도 은유적이었다. 악을 일삼은 지도자의 교체는 단지 신악으로의 교체였을 뿐이었다. 일통강호라는 것도 질서의 회복이라기보다 권력의 확대와 독점이었다.

    소오강호의 주인공들은 자신이 바라는 대로 살아가지 못한다. 사람은 강호에 얽혀 쉽게 떠날 수 없으며, 처신은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人在江湖 身不由己). 그런데 주인공인 영호충은 정파, 사파의 도식을 뛰어넘어 자유로운 무협정신을 구가한다. 그는 진정한 유협이요, 호걸이었다.

    소오강호의 이야기는 무협을 소재로 하지만, 기실은 깊은 인문정신을 구현하고 있다. 저널리스트이자 무협소설가인 진융을 이번 ‘중국인문기행’에서 만난 사람들의 반열에 넣고 싶다. 그의 죽음에 삼가 조의를 표한다.

    김태희 (다산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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