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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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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풍수지리] 자신의 묘를 직접 조성한 노인

  • 기사입력 : 2018-11-02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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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순을 바라보는 노인과 함께 그가 상속받은 산의 한 자리에 자신과 아내의 신후지지(身後之地·살아 있을 때에 미리 잡아 두는 묏자리)로 정해둔 곳을 간 적이 있다. 신후지지는 수의(壽衣·염습할 때에 시신에 입히는 옷)와 함께 살아 있을 때 미리 준비해두면 장수(長壽)한다는 풍습의 일환이기도 하거니와 막상 큰일을 당했을 때, 당황해 서둘러 처리하다가 낭패를 보지 않도록 후손을 배려하는 의미도 있다. 노인 또한 그러한 생각으로 부모의 봉분 아래에 자신들의 신후지지를 마련하고 후손이 벌초하는 것조차 힘들 것을 우려해 화장(火葬)해서 뼛가루만 넣으면 될 수 있게 해두었다. 광중(무덤구덩이)에 석관(石棺)을 두르고 장대석과 하박석 및 비석(사망일자란만 남겨둠)까지 설치해 두어 평장(平葬)을 할 수 있는 모든 채비를 다 해둔 것이다.

    요즘에는 조상들의 무덤을 모으거나 자신의 묏자리뿐만 아니라 묘역 정비와 제반 시설까지 모두 갖추어서 후손의 걱정을 덜어주려는 노인들을 종종 보게 된다. 노인은 매장(埋葬)을 한 부모 묘와 자신들의 터에 대한 감결(勘決·잘 조사해 결정함)을 원했다. 부모 묘는 득도 없고 해도 없는 터여서 후손의 노력 여하에 따라 성공할 수 있는 곳에 안치돼 있었다. 다만 모친의 묘에 생기가 뭉쳐 있어 쌍분(雙墳)보다는 합장(合葬)을 하면 좋은 터였다. 나성(羅城·봉분 위에 두른 둔덕)은 없었지만 경사진 곳을 ‘ㄴ’자로 절개했기에 별도의 나성이 필요 없는 곳이었다.

    나성은 외부의 흉풍과 물이 봉분으로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봉분 외곽에 쌓는다. 봉분 앞면에 둘레돌을 했으나 멧돼지가 파헤친 흔적이 있기에 ‘나프탈린’을 묻어두고 얇은 알루미늄 조각을 여러 개 달아두도록 일렀다. 부친 묘는 이끼가 많이 있었는데, 광중 내부에 물이 있지는 않았으며 건수(乾水·빗물)와 주변의 잡목에 의한 것이어서 배수로를 만들고 잡목은 반드시 제거하라고 했다.

    안산(앞산)은 알맞은 높이에 자리하고 있어서 묘를 향해 부는 흉풍과 살기를 막는 역할을 잘 하고 있었다. 노인 부부의 신후지지도 부모 묘의 좌향(坐向·방향)과 같이 했으며 평장의 간격은 20㎝ 정도였다.

    평장한 곳은 여자 쪽의 터에 생기가 있어서 남자의 자리를 옮기는 것이 더 좋지만 이미 조성을 한 곳이었고, 남자의 터도 보통의 자리는 되기에 그대로 둬도 무방하다고 했다. 다만 평장을 한 노인 부부의 광중에 석관을 해둔 것은 차후 뼈를 묻을 때는 반드시 빼도록 일렀는데, 석관이 있으면 삼투압 현상으로 광중에 물이 스며들어 자연으로 속히 돌아가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좁은 순전(脣前·무덤 앞에 닦아 놓은 평평한 땅의 앞)은 후손(특히 말자를 지칭함)의 복록(福祿)을 줄이므로 성토를 해 넓은 순전을 확보하도록 주문했다. 산에서 내려오는데 노인의 얼굴이 더없이 편안하고 밝은 표정으로 변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여주시 산북면에는 고려의 신하로서 성종 12년(993)에 거란의 80만 대군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대화로써 물러가게 한 서희(942~998) 장군의 묘가 있다. 서희의 묘는 부인 묘와 쌍분을 이루고 있으며 직사각형 돌로 2단의 둘레돌을 두른 직사각형 봉분이다. 상석과 장명등이 있으며 묘의 좌우에는 문신이자 무신인 장군답게 문인석과 무인석이 한 쌍씩 있다. 산봉우리 끝부분을 ‘ㄴ’자로 절개했기에 특별히 조성한 나성은 없으며 용맥은 좌우로 요동을 치며 힘차게 내려왔고, 상하로 기복도 왕성해 생룡(生龍)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토질도 양호하고 지기(地氣)도 좋으며 측정 결과 생기를 머금은 자리에 봉분이 자리하고 있었다.

    장군의 묘에서 보이진 않지만 아래로 내려가면 부친인 서필의 묘가 있는데, 이런 형태를 역장(逆葬·조상의 묘 윗자리에 후손의 묘를 씀)이라 한다. 필자는 서필의 묘에서 한참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비록 역장이 당시에 크게 흠이 되진 않았지만 백성도 선망하던 장법은 아니었다. 장군의 묘 바로 앞도 아닌 끝부분에 부친 묘가 있다는 것과 장군 묘 주변의 지기를 측정한 결과 더 나은 자리가 있는데도 부친의 묘를 멀리 둔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주재민 (화산풍수지리연구소장)

    (화산풍수·수맥·작명연구원 055-297-3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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