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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부끄러운 숙제- 정둘시(수필가)

  • 기사입력 : 2018-09-14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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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로 들어서니 찜통 같았던 더위도 그나마 한발 물러선 듯하다.

    모처럼 맞이하는 여유로운 휴일이라 미루고 미루었던 숙제를 하기로 했다. 늘 손톱 곁에 돋은 가시처럼 마음에 걸렸지만 지난여름이 어디 예사 여름이었던가. 불볕더위에 어쩌지 못하고 오늘에야 마음을 낸 것이다.

    식구들이 모두 외출하고 난 뒤 베란다로 나갔다. 일렬로 늘어서 있는 상자들을 가만히 헤아려 본다. 여남은 개는 족히 되지 싶다. 겉포장을 보니 양파며 포도, 사과에다 헛개나무, 오가피, 칡까지 즙을 내어 담아둔 봉지들이다.

    어디 베란다뿐이랴. 냉장고 안에도 언제부터 있었는지 기억조차 아득한 봉지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이래저래 몸에 좋은 것이라며 선물로 받을 때는 나의 건강을 생각해준다는 고마움에 덥석 받아두었다. 과일은 즙으로 짜서 제철이 지나더라도 두고두고 먹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조언에 솔깃해져 무작정 만들어 두기도 했다.

    어설픈 상식을 곁들여 이것저것 번갈아 가면서 하루에 몇 번이고 먹으려 했던 치밀한 계획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바쁜 일상 속에 급기야 그 존재 자체를 잊어버렸다.

    가끔 생각이 나서 마셔 보려면 언제 구입한 것인지조차 가물거려 먹기가 망설여졌다. 꺼림칙한 생각 탓에 점점 외면하게 되었고 결국 천덕구니가 되고 말았다.

    섣부르게 부린 욕심의 대가로 비좁아져 버린 통로를 이리저리 불편한 걸음으로 비켜 다녀야 했다. 마실 수도,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어 쌓아둔 즙들만큼이나 포개진 마음의 무게도 결코 가볍지 않았다. 반복되는 망설임에 두 눈을 질끈 감고 오늘은 기어이 종지부를 찍기로 하였다. 몇 봉이나 먹었을까. 아예 포장조차 뜯지 않은 것도 있다. 상자를 헐어 싱크대에 쏟아두고서 하나하나 가위질을 하여 즙액을 흘려보낸다.

    빈 봉지가 수북이 쌓여 갈 즈음 가위질을 멈추게 하는 마음소리를 듣는다. 하수구로 무심히 빨려 들어가는 저 짙은 갈색의 진액은 비록 만난 적은 없지만, 어떤 이의 땀방울로 이루어진 결정체가 아니던가. 아직도 코끝을 향기롭게 스치는 과즙은 무슨 까닭으로 피를 토하듯 싱크대 안에서 흩뿌려져야 하는가.

    뙤약볕이 무섭다고 놀러 가는 것조차 두려워 집 안에 숨어버린 내가, 한 알의 과실을 익히느라 땀 흘린 사람들의 노고를 생각이나 해 보았는지. 한때는 허리 굽은 내 아버지의 모습이기도 했지 않는가. 염천에 펄펄 끓는 약탕기 앞에서 씨름한 그들에게는 또 무어라고 둘러대어야 하나.

    내가 지불한 몇 푼이 면죄부가 될 리 만무하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을 함부로 하지 말라’던 어른들의 가르침이 어찌 그냥 나온 말이겠는가.

    너나 나나 걱정 없이 밥 먹고 살게 된 것이 얼마나 되었다고 쓰레기통에는 멀쩡한 음식물이 넘쳐난다. 신선할 때 차라리 이웃집에 나누어 주기라도 할 것이지. 가족들이 집을 비운 사이 아무도 모르게 거사를 치르고 있는 내 모습이 딱도 하다.

    그 많던 즙들은 흐르는 물길에 흔적 없이 씻기어 갔지만, 부끄러움은 찌꺼기처럼 가슴에 남아 쉬이 가시지 않는다.

    정둘시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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