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3월 29일 (금)
전체메뉴

[생활 속의 풍수지리] 주세붕, 그는 누구인가?

  • 기사입력 : 2018-03-09 07:00:00
  •   
  • 메인이미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을 건립한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였던 주세붕(周世鵬·1495~1554) 선생의 본관은 상주(尙州), 호는 신재(愼齋)이고 주문보(周文)의 아들이다. ‘백운동서원’의 다른 이름은 ‘소수서원’으로 1550년에 풍기군수였던 퇴계 이황(1501~1570)의 청원으로 ‘소수(紹修)’라는 사액(賜額·임금이 사당, 서원 등에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리던 일)을 받고 공인된 교육기관이 되었다. 소수는 ‘무너진 학문을 다시 이어서 닦는다’는 뜻으로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1541년 풍기군수가 된 주세붕은 사림을 교육하고 향촌의 풍속을 교화하려는 목적으로 서원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공삼(貢蔘·조선시대에 지방에서 공물로 상납하는 蔘)의 폐단으로 고통받는 군민들을 위해 산삼 씨앗을 소백산에서 채취해 인삼재배를 처음으로 함으로써 오늘날 풍기인삼이 널리 알려지게 했다. 선생은 백성들의 고통을 헤아리는 목민관이었으며 청백리에 녹선(錄選·벼슬 따위에 추천해 관리로 뽑음)되었고, 예조판서에 추증(나라에 공로가 많은 관리가 죽은 뒤에 품계를 높여 주던 일)되었다.

    소수서원은 신라시대 때 창건된 ‘숙수사(宿水寺)’라는 절터에 세워졌다. 서원 입구에는 학자수(學者樹)라 불리는 ‘적송군락’과 ‘수령 500년된 은행나무’와 ‘숙수사지 당간지주’가 음풍(陰風)과 살기(殺氣)를 막는 비보(裨補·흉한 기운을 차단시킴) 역할을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전당후묘(前堂後廟), 즉 앞에 공부하는 공간을 두고 뒤에 제사 지내는 공간을 두는 데 반해 소수서원은 동쪽을 강학공간, 서쪽을 제향공간으로 배치했다. 선생은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 ‘경(敬)’이라는 글자를 바위에 새겨 두었으며 이를 ‘경자바위’라 한다. ‘경자’는 선비의 덕목을 나타낸 글자로 공경과 근신의 자세로 학문에 집중한다는 의미이다.

    함안군 칠서면에 위치한 무산사(武山祠)는 본래 주세붕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생가(生家) 자리에 건립한 서원 터로서 1676년(숙종 2년)에 임금이 ‘덕연(德淵)’이란 편액을 하사했다. 이후 서당을 지어 후학들을 가르쳤는데, 그것이 곧 ‘무산서당’이다. 서당으로 진입하는 무릉 마을 입구에는 효자비(孝子碑)와 쌍절각(雙節閣)이 있는데, 특히 마을 입구 가까이 있는 쌍절각은 수구막이(水口·입구의 생기 누출을 막기 위한 비보물) 역할도 하고 있다. 무산사는 주변의 산들이 둘러싸여 있고 낮은 지대여서 일반 주택보다는 서원이나 사당으로의 용도에 더 적합하며 주산(뒷산)으로부터 뻗어 내려온 넓고 부한 내룡(來龍·산줄기)은 산의 끝부분의 평탄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좌청룡과 우백호도 적당히 둘러 싸여 흉풍을 막고 있으며 안산(앞산)은 문필사(文筆砂)로 마치 책을 펼쳐 놓은 것 같은 형상이다. 함안군 칠서면에는 주세붕 선생과 그의 부친 문보, 큰조카 조(造)의 묘도 있다.

    주산에서부터 상하기복과 좌우요동을 하면서 전진하는 내룡은 기운이 뭉쳐져 있는 토석의 둔덕인 현무정(용의 봉우리)에서 직각으로 꺾이어 아래로 진행하는 넓고 탄실한 진용(眞龍·참된 용)이다. 혹여 용이 봉우리를 일으키지 못하면 결코 진용이라고 할 수가 없다. 게으름을 부리지도, 나태하지도 않은 내룡일 뿐만 아니라 묘역에 도달할 때까지 흐트러지지 않는 자태와 함께 위엄을 과시하는 생룡(生龍)이다. 우백호(우측산)는 형상이 뚜렷해 제 역할을 다하고 있으나, 좌청룡(좌측산)은 꽤 멀리 있어 흉풍을 막을 요량으로 나무를 심었으며, 안산 또한 빈약해 묘소를 향해 부는 바람을 차폐시킬 목적으로 묘역 앞에 나무를 심어서 비보(裨補)를 했다.

    선생의 부친인 주문보의 묘는 생기가 뭉쳐진 자리이며 ‘둘레돌’이 봉분을 굳건하게 받쳐주고 있다. 유명한 효자로도 널리 알려진 선생의 묘 좌우측에는 특이하게도 글이 새겨진 망주석이 있다. 좌측의 망주석에는 ‘수무부모(誰無父母·부모 없는 사람이 어디 있나)’란 글이 있고 우측의 망주석에는 ‘숙비인자(孰非人子·자식 아닌 사람이 어디 있나)’란 글이 그것이다. 효자였고 청렴한 관리였으며 뛰어난 유학자였던 선생의 정신을 본받아 실천하는 관리가 절실히 필요한 시기다.

    주재민 (화산풍수지리연구소장)

    (화산풍수·수맥·작명연구원 055-297-3882)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