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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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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풍수지리] 파묘한 터를 다시 쓰다니!

  • 기사입력 : 2017-11-24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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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예천군 지보면에는 조선 8대 명당 중의 하나인 동래 정씨 중시조 정사 선생의 묘소가 있다. 3남 정난종의 후손 중에 13명의 정승과 문과급제 123명, 소과는 부지기수로 나왔다 하니 명당임에는 틀림이 없다. 묘소 양옆에는 작은 봉이 있는데, 자손의 발복(發福)이 적으면 봉분 양쪽에 작고 둥근 봉을 만들어두면 발복한다고 하여 봉을 만들었을 수도 있고, 좌청룡과 우백호의 감싸줌이 부족해서 흉풍을 막기 위한 비보(裨補)라고 볼 수도 있다.

    묘소 감정의 정확도는 자연을 얼마나 이해하고 그 속내를 꿰뚫어 알아차리는가에 달려 있다.

    주산의 용맥(龍脈)인 산줄기는 확연하게 좌우요동을 하는 생룡(生龍)이지만, 계곡풍으로 인해 군데군데 주름이 많으며 산만하면서 결인속기(기운을 묶어서 모음)가 다소 부족했다. 또한 바깥 청룡 끝부분을 안산(案山·앞산)으로 하여 향(向)을 잡았으나 너무 낮고 요원해 안산의 역할(흉풍과 살기를 막음)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나 당판(堂板·묘와 그 주변)은 균형과 조화를 이뤘으며 묘소 앞 전순(절하는 곳과 그 주변)은 넉넉하고 대명당(묘소 앞의 넓은 땅과 전답)은 웅장하기에 길지(吉地)임은 틀림이 없었다.

    약포 정탁(청주 정씨) 선생은 명종 13년(1558) 문과에 급제해 6조 중 5조의 판서와 우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했으며 시호는 정간공(貞簡公)으로 영의정에 증직됐다. 특히 난중에 충장공(김덕령 장군)과 충무공(이순신 장군)에 대하여 죄가 없음을 상소해 구원함으로써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경북 안동시 풍산읍에 위치한 선생의 묘소는 마치 우뚝 솟은 돌혈(突穴)같았으나 전순도 적절히 갖췄으며 당판은 생기가 똘똘 뭉쳐져 어느 한 곳도 당차지 않은 데가 없었다. 용맥(산줄기)은 정갈해 추한 데가 없으며 자신의 최종 목적지를 향해 결인속기(기운을 모아서 묶음)와 함께 좌우요동을 치고 상하기복을 하면서 내려가는 활기찬 생룡이었다. 묘소 좌측 산인 청룡과 우측 산의 백호가 취약해서 흉풍을 맞는 것과 안산이 다소 멀어서 흠이 되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극복할 능력을 갖춘 당판이었다. 좌향(坐向)은 간좌곤향(艮坐坤向·남서향)이었다.

    얼마 전, 합천군 율곡면 모처의 ‘파묘 터(구광터)’의 후손들이 복록(福祿)을 누린다는 소문을 듣고 의뢰인의 부친을 ‘파묘 터’에 이장할 목적으로 감정 요청을 받은 적이 있다. 만일 ‘파묘 터’가 ‘생자리(손을 대거나 건드린 적이 없는 자리)’보다 좋은 이른바 ‘명당’이나 ‘명당에 가까운 자리’라면 다시 쓰더라도 문제될 것은 전혀 없다. 그러나 한 번 쓴 자리에서 1자 정도 더 파서 안치해야 ‘생자리’나 다름없게 되며 이미 팠던 자리가 5자가 넘는다면 더 파서는 안 된다. 만약 5자가 안 된다면 5자가 되도록 파서 안치하면 된다.

    ‘파묘 터’의 주산(뒷산)에서 뻗어 내려온 용맥(산줄기)은 좌우로 움직임이 있고 지저분한 골이 없으므로 생룡임은 틀림없었다. 당판의 기운을 측정한 결과 주산을 바라보는 방향에서 우측의 2분의 1은 땅속에 수맥과 험한 돌이 많았지만, 좌측 2분의 1은 ‘흉한 파’가 전혀 없는 좋은 터였다. 좌측이 상하로 3기의 묘가 있다가 파광(破壙·구덩이를 팜)한 자리였다.

    안산이 너무 요원해 흉풍이 치는 것이 흠이었으나 지기(地氣)를 손상시키지는 않았다. 또한 안산과 파묘 터 사이에 넓은 폭의 고인 듯이 흐르는 큰물(황강)이 있어서 ‘가까운 안산’으로서의 역할을 잘 하고 있는데, 이러한 물을 ‘진응수’라 하여 매우 길하게 여긴다.

    합천군 덕곡면 모처에 있는 무덤 2기를 감결(勘決·잘 조사해 결정함)한 적이 있었다. 의뢰인의 부모 묘소는 용맥이 퍼져 있어서 작은 기운이 힘차게 내려오는 그야말로 ‘무득무해(無得無害·득도 없고 해도 없음)’한 ‘터’로서 보통의 자리였는데, 묘소의 좌우로부터 흉풍을 심하게 맞고 있어서 작은 청룡과 백호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나성(羅城·흙둔덕)을 쌓도록 했다. 작은 상석만 있기에 다른 석물을 두어도 전혀 해가 없는 자리라고 했으며 묘소 앞의 여기(餘氣·최종 남아있는 기운)가 있는 전순이 짧아서 앞쪽의 흙을 성토해 전순을 넓히도록 했다.

    주재민 (화산풍수지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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