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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8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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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과 떠나는 우리나라 여행] 청산도

느림의 가치 알려주는 자연 그대로의 섬
간단한 짐만 꾸려 훌쩍 떠난 여행

  • 기사입력 : 2017-09-20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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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봄이 오면 청산도는 그 자체로 꽃다발이 된다. 올해 초봄에 혼자 카메라와 옷가지들, 읽을 책 몇 권만 챙겨 2박3일간 청산도를 다녀왔다. 완도에서 청산도로 들어가는 배편은 하루에 다섯 번 있다. 완도에서 45분 정도 페리를 타고 들어가면 꽃들이 기다리는 청산도를 만날 수 있다. 청산도는 사람의 손길이 많이 가지 않은 섬이었지만 우리나라 최초로 슬로길이 만들어지고, 폐교를 개조해 느림섬, 여행학교라는 게스트하우스를 만들며 본격적으로 섬을 찾는 발길이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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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산도 해변에서 바라본 일몰.



    청산도는 유입인구가 적어 방문객을 위한 식당을 찾아보기 힘들다. 여행배낭을 꾸리기 전 급하게 노트북을 켜 전화로 예약해 이틀을 묵었던 민박집은 아침과 저녁을 5000원에 제공해 줬다. 정해진 식단은 없었다. 아침은 일찍 일을 나가시는 주인아저씨에 맞춰 간단하게 먹고, 저녁은 주인아저씨가 낚시로 건져온 이름 모를 생선으로 회를 떠서 먹었다. 당시에 생선 이름을 묻고, 들었지만 금세 잊고 말았다. 밥상의 김치가 자극적이지 않고 밥맛을 돋웠는데, 외국인들도 좋아할 깔끔한 맛이었다. 김치에 대해 여쭤보니 청산도는 바닷물이 너무 깨끗해 김장할 때 따로 염을 하지 않고 배추를 바닷물에 장기간 빠뜨렸다 꺼내 깔끔한 맛을 낸다고 한다. 도착한 날 저녁과 섬을 빠져나올 때 아침을 포함해 총 네 끼를 먹었다.

    몇 가구 살지 않는 청산도는 밥 때가 되면 인가는 밥 냄새로 가득 찼다. 우리 집과 남의 집이 같은 시간에 밥을 먹는다는 사실을 공유할 수 있어 집과 집 사이 인정이 번져 나왔다. 뜨거운 압력을 지녔음에도 절대 폭발하지 않는 밥솥처럼 청산도의 밥 때에는 사람도 꽃도, 바다마저 온순해졌다.

    청산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떠올리면 역시 양귀비꽃이 만발한 서편제 촬영지가 떠오른다. 꽃밭 한 가운데 정자는 우뚝한 만큼 외로워 보였다. 정자에서 햇빛을 피해 모여 수다를 나누고 있던 할머니들은 빈집을 닮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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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산도 꽃들은 여느 꽃들과 달리 아름다웠다. 이유는 도시나 축제에서 목격하는 잘 정리된 꽃들과 달리, 그저 씨앗 닿는 대로 피었기 때문이리라. 신이 있다면 남쪽에서부터 봄 기운을 뿌리며 올라오는 길에 청산도에서 잠시 쉬다 그만 실수로 꽃을 쏟아버린 것처럼, 꽃은 길목마다 두서없이 가득했다. 청산도 곳곳의 꽃들은 아무런 질서를 시도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피어 더 찬란했다. 남도의 봄꽃들은 중량감 없이 흙을 밀어내고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여름이 오기 전, 어떤 꽃은 한 잎, 한 잎 추락한다. 어떤 꽃은 떨기째 툭 떨어지고, 때가 되면 두말없이 진다. 봄은 그리운 사람을 만났던 꿈처럼 지나간다.

    꽃이 져도 뿌리는 남아 있다. 여행 내내 꽃 핀 길을 따라 걸으며 좋아했던 기억은 뿌리처럼 남았다. 그 꽃 뿌리가 내년에도 꽃을 피우듯이, 좋았던 기억은 다시 꽃을 찾아갈 지표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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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편제 촬영지 정자 앞에 피어 있는 붓꽃.



    한적하게 마을을 돌아다니는데 무덤이 유독 많이 보였다. 봉분 근처에 할머니들이 앉아 나누는 대화에서 장례를 두 번 치른다는 내용을 엿들어 찾아보았다. 우리나라의 장례 풍습 중 복장제(復葬制)라는 것이 있었다. 말 그대로 두 번 장례를 치른다는 뜻이다. 사람이 죽으면 짚, 풀 등으로 이엉을 엮어 풀 무덤을 만들어 시신을 묻었다가 2~3년 후 남아있는 뼈를 꺼내 다시 땅에 묻는 장례방식이다. 이런 이중 장례풍습은 남해안 몇몇 섬에만 남아 이어져왔다. 주인아저씨께 여쭤보니 장례를 두 번 치를 만큼 힘 좋은 젊은이들이 죄다 청산도를 빠져나가면서 복장제가 중단됐다고 했다.

    여행을 다녀온 뒤, 청산도에 혼자 가서 뭘 하다 왔냐고 많이들 물었다. 걸었다. 아주 느리게. 해 뜰 때 집을 나서 천천히, 천천히 봄을 만끽하며 가만히 걸었다. 여행객이 몰리는 성수기나, 낚시꾼이 찾아오는 주말도 아니었기에 방해 없이 여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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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산도 슬로길의 문구.



    청산도의 슬로길 걷기 코스는 영화 서편제와 드라마 피노키오, 봄의 왈츠, 그리고 예능 프로그램인 1박2일을 촬영하면서 아름다운 꽃길로 잘 알려졌다. 걷기 코스는 범바위 정상을 향하는 길을 제외하면 가파른 오르막 없이 대부분 평탄한 길이라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다. 꽃천지 청산도는 범바위를 중심으로 이룩된 섬이다. 청산도의 등뼈와도 같은 범바위는 바위라는 단어의 범주를 벗어나 크기가 산 하나에 버금가는 큰 바위다. 산의 형세를 가진 범바위는 바로 옆에 보적산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범바위는 자철석 성분이 아주 많기 때문에 지구 내부의 자기장보다 더 힘이 세다. 그래서 옛날 청산도를 찾아오는 배들이 범바위 주변 해안에서 나침반이 먹통이 돼 헤맸다고 한다. 범바위 전망대에 올라 연둣빛 바다를 내려 보면 해안선을 경계로 섬을 보듬듯 핀 꽃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꽃은 섬의 시간을 느리게 만들어, 꽃을 보는 시간 동안 세상이 잠시 멈춘 기분을 준다. 서편제 촬영지에서 범바위 전망대로 올랐다 장기미 해변으로 내려와 숙소로 돌아오니 하루가 다 지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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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착장에 페튜니아 꽃이 활짝 피어 있다.



    남해바다는 바람 타고 흐를 뿐이고, 섬은 우연히 생겨났으며, 숲은 씨앗 닿는 대로 자랐을 뿐이다. 자연은 태생부터 무정하다. 그럼에도 사람은 자연이 가득한 곳으로 가면 위로를 얻고 안락함을 느낀다. 아마 자연은 존재함에 있어 아무런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의도가 많아 의욕이 지나치기도 한 사람들이 위안과 온정을 받아가는 것이리라.

    청산도에서의 3일은 새순처럼 연하고 깊었다. 숙소의 밥상에서 사람들과 토막토막 대화를 나눴다. 섬을 찾아온 사람들은 앞을 나아가기 지쳐, 내 안을 들여다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고 한다. 아예 휴대전화를 집에 두고 온 사람도 있었다. 지구 바깥으로 벗어나야 비로소 지구의 아름다움을 목격할 수 있듯, 인생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인생을 한 번쯤 내려놓아 본 사람이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려면 자신을 벗어 보아야 한다. 모진 생활에 팽개쳐둔 나를 모색하기 위해, 생활의 바깥으로 떠나는, 그런 제 멋대로의 삶은 분명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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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진백
    △ 마산 출생·경남대 재학
    △ 2015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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