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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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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지방신문협회 공동기획] 최진석의 老莊的(노장적) 생각

부대끼는 삶 속에서 순수성 잃지 않는 것이 ‘道’

  • 기사입력 : 2017-08-22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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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이 나기 전, 아주 어릴 적에 참으로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잠깐 한 적이 있다. 출가 (出家)를 하면 어떨까? 출가를 해볼까? 원래 출가의 근기를 타고 난 사람이라면 절대 입 밖에 내지 않고 혼자만 품은 채 열병을 앓고 또 앓다가 결행하기 직전에 공표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가볍기가 한량없어서 생각이 들자마자 몇 밤도 넘기지 못하고 어머니에게 말해보았다. 초여름의 이른 오후였다. 적당히 데워진 마룻장에 등을 대고 누워 어머니를 빤히 쳐다보며 종알댔다. 그런데 의외로 어머니께서 내 말을 너무 진지하게 듣고 놀라시자 얼른 포기했다. 훗날 어머니는 내가 등산 가는 것도 싫어하셨다. 저 높은 산에 들어가 어머니 본인이 살고 계시는 낮고 거추장스런 이곳으로 내려오지 않을까봐 걱정하셨던 듯하다. 당신이 낳고 당신이 기르면서도 그 아들의 성정이 얼마나 폴폴 가벼운지는 내내 모르셨던 것 같다. 자식에게 사랑과 기대만 퍼부으시느라 정작 본바탕을 애써 외면하셨던 그런 분을 괜히 괴롭혀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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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필용 作 ‘순수’

    그렇게 하여 나는 성불(成佛)의 길보다 효자(孝子)의 길을 택했다. 성불은 저 먼 곳에서 빛나는 이상적인 달관의 경지로 보였고 효자는 구구절절 생활의 때가 묻은 이곳의 일 같았다. 그 뒤로 내 어깨와 견줄만한 높이에 있는 것들은 어쩐지 하찮고 심드렁했다. 아주 특별하고 높은 곳에서만 빛나는 어떤 것을 포기한 사람이 갖는 약간 비굴해진 느낌이랄까. 그것을 감추느라 내 어깨 아래의 삶 속에서 얼마간은 더 뻣뻣했는지도 모르겠다. 효성은 어쩐지 땔감들 사이를 직선으로 헤집고 들어와 잠든 먼지들을 다 깨워놓은 석양빛 드는 부엌의 아궁이에서나 일어나는 평범하고도 평범한 일 같았다. 밥은 나오지만 눈길은 머물지 않는…. 어쩔 수 없이 한동안 내 눈길은 차라리 파르스름한 빛이 남몰래 감도는 젊은 탁발승의 쓸쓸한 ‘삭발’에 닿으려 했다.

    노자나 장자를 많이 읽는다는 것을 아는 친구들은 내게 항상 크고 특이한 얘기들을 듣고자 했다. 일상의 규칙들을 무시하면 더 환호하고 내가 학문적으로 이해한 것을 몸소 실천까지 한다고 인정해주기도 했다. 시험을 열심히 준비해도 친구들은 노장(老莊) 학도답지 않다고 했다. 성공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조금이나마 비치면 장자의 소유유 (逍遙遊)를 배운 사람이 왜 그러냐고 했다. 신발과 옷가지만 남기고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성선(成仙) 차원 정도의 얘기는 되어야 다들 만족했다.

    볕이 낮게 들어오는 봄날 오후, 어느 맥주 집 창가에 앉아 수업에 들어가지 않은 날이었다. 먼저 일어서면서 친구들은 나를 널리 이해한다는 뜻으로 말했다. “쟤는 도가 철학을 하니까 저래. 괜찮아.” 이 일탈은 도가 철학과 아무 상관없다. 게으름이자 방종일 뿐이다. 그저 각자 한 편으로 치우쳐 있는 사람들끼리의 부족한 교류였을 뿐이다.

    구작자(瞿鵲子)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름에는 깜짝 놀라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 까치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장오자(長梧子)라는 사람이 있었다. 아주 오래 산 오동나무라는 뜻을 가졌다. 오동나무[梧]는 깨달음을 나타내는 글자인 ‘오’(悟)자와 발음이 같아서 가끔 섞어서 쓰기도 한다. 여기서 장오자는 깨달음에 이른 도가적 인물을 나타내고, 구작자는 아직 거기에 이르지 못한 사람, 즉 유가적인 인물을 나타낸다.

    구작자가 장오자에게 이렇게 묻는다. “제 스승에게서 들은 얘깁니다만, 최고 높은 수준에 이른 사람인 성인은 세상일에 빠지지 않고, 이익을 좇지 않으며, 해가 닥쳐도 피하지 않고, 무언가 추구하는 것도 없고, 정해진 길을 따르지도 않고, 말을 하지 않아도 무언가 말해지고, 말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말한 바가 없으며, 이런 식으로 하면서 이 세상 밖에서 유유자적한다고 합니다. ‘도’(道)를 실천한다면 이 정도는 되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이 얘기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여기에 장오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런 말은 황제(黃帝) 정도 되는 사람이라도 알아듣지 못할 것이요. 그러니 당신 스승인 공자가 어찌 알 수 있겠소. 또한 당신도 이런 얘기를 ‘도’를 실천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지나친 단견이오. 달걀을 보고 새벽을 알리기를 바라고, 탄알을 보고 곧바로 새 구이를 찾는 것처럼 급하오. 그냥 당신을 위해서 내 생각을 아무렇게나 말해볼까요? 그러니 편하게 아무렇게나 들어주시오. 해나 달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우주를 겨드랑이에 낀 채, 만물과 잘 맞아 서로 어그러지지 않고, 모든 것에 억지로 자기 뜻을 부과하지 않은 채 그대로 놓아두고, 가치 판단 기준으로 귀천을 나누지도 않소. 세상 사람들은 온 힘을 들여 힘들게 살지만 성인은 우둔하며, 오랜 세월동안 세상사에 섞여있으면서도 자신만의 순수함을 지키고 있소.”(『장자·제물론』)

    가장 높은 경지나 깨달음 혹은 절대 성숙은 ‘이곳’을 떠나서 훨훨 높이 날아올라, 이곳과 전혀 다른 저 먼 곳의 어디에 안착해 있으면서 이곳을 내려다보는 어떤 것이 아니다. 장오자가 말하듯이 세상사와 함께 하면서 그것들과 어그러지지 않고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함께 나아가면서 자신만의 ‘보물’만은 절대 놓치지 않는다. 그 보물을 장자(莊子)는 ‘순수함’(純)이라고 말했다. 바로 자신을 자신이게 하는 자신만의 고유한 특질인 것이다. 여기서 자신이 평생 수행해야 할 ‘사명’이 나온다. 그럼 자신의 ‘순수함’을 지키는 바로 그 ‘우둔한’ 성인은 어떤 높이에 있는 사람인가. 장자는 말한다. “해나 달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우주를 겨드랑이에 낀” 정도의 사람이다. 지식이 되었든 사고의 폭이 되었든 감각이 되었든 간에 해나 달이나 우주의 높이 내지는 넓이에 닿아 있다는 뜻이다. 그런 후에야 세상사와 어그러지지 않을 사고의 두께를 가진 자로서 자신만의 편협한 잣대로 귀하고 천한 것을 나누어 세상을 대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장자가 말하는 ‘우둔함’이다. 자신만의 잣대가 없기 때문에 속세에서는 그를 바보나 우둔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도시에서 지친 사람들은 오지의 발길 끊긴 산속을 꿈꾼다. 그래서 많은 시간을 들여 숨어들 곳을 찾아 헤맨다. 도시에서의 일을 끊고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승리로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연 속이라도 자신만의 ‘순수함’을 지키지 못한다면, 방만과 게으름을 벗어날 길이 없다. 지력이나 감각이 꼭 ‘해나 달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우주를 겨드랑이에 낀’ 정도가 될 것까지야 없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만 유지되어도 매일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삼겹살을 구워먹는 한가한 유흥으로는 자유나 자족의 경지를 맛볼 수 없다.

    자족이나 자유의 중심 자리는 항상 ‘자기’(自)가 차지한다. ‘자기’가 지켜져야 자연스럽기도 하고 자유스럽기도 하고 자족하기도 한다. ‘자기’가 지켜지지 않은 자유가 방종이고, ‘자기’가 지켜지지 않은 ‘자족’이 나태함이고, ‘자기’가 지켜지지 않은 ‘자연스러움’은 촌스럽다. 최종 승리의 길은 자신만의 순수함을 지키느냐 지키지 못하느냐가 결정한다.

    자기가 굳건하게 지켜지는 사람은 절대 어느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다. 도시에 있든 시골에 있든 자신이 중심을 지키면 된다. 자기가 중심을 지키는 한 도시에서도 시골을 살 수 있고, 시골에서도 도시를 살 수 있다. 도시도 이상향이 아니고, 시골도 그 자체만으로는 절대 이상향이 아니다. 자기가 약한 사람은 도시에 있을 때 시골을 꿈꾸고, 시골에 있으면서 도시를 꿈꾼다. 자기의 순수함을 지키는 사람은 도시에 있건 시골에 있건 자신이 있는 곳에서 두 세계를 ‘우둔’하게 실현한다.

    자아의 실현이나 완성은 장소에 좌우되지 않는다. 오히려 장소를 지배하는 자신의 사명이 결정적이다. 자기 자신만 가지고 있는 고유한 그 ‘순수함’이 바로 이상향을 좌우하는 손잡이다. ‘순수함’이 장소를 지배하게 해야 한다.

    인간의 삶은 따로 있지 않다. 유동적 우주에 섞여가는 한 형태인데,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이상 그것 자체가 바로 우주적이다. 이런 점에서 자연과 인간은 분리되지 않는다. 인간성 안에 자연성이 들어있고, 자연성이 인간성의 토대다. 이렇다면 인간이 하나의 관점을 고집하며 자기 정체성(正體性)을 주장한다면 매우 정체적(停滯的)이거나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 장자는 세계를 이렇게 묘사한다. “아지랑이나 먼지, 이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생물이 서로 입김을 내뿜는 현상이다. 이렇게 본다면 하늘이 새파란 것은 진짜 원래부터 그 색깔인 것일까? 아니면 멀리 떨어져서 끝이 없기 때문일까? 9만리 높은 하늘을 나는 대붕 또한 위에서 내려다보면 파랗게 보일 것이다.”(『장자·소요유』)

    야마(野馬)로 표현되는 아지랑이와 진애(塵埃)로 표현되는 먼지는 정해진 방향 없이 계속 움직인다. 정해놓은 방향이나 목적도 없이 그저 움직일 뿐이다. 왜 움직이는지 알 수 없다. 그것이 자연이다. 이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운동하면서 우주의 완결성을 이루는 것과 같다. 여기서 자유가 태어난다. 장자는 이 문장을 통해 특정 지점에서 결정되는 관점의 기능을 철저히 무화시킨다. 하늘은 여기서 올려다 볼 때만 파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한 가지 기준으로 나를 고정시켜 우주 운행에 방해를 주면 안 된다. 이것이 우주적 원리이고 거대한 성취가 시작되는 출발점이다.

    이제 나는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이 세상의 일을 열심히 하면 바로 여기서 저 세상이 구현된다는 것을. 저 세상은 따로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진짜 자유인은 도시에 살면서도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자신을 관조하며 천천히 움직이는 사람이란 것을. 원수를 사랑하는 일이 왜 나를 살리는 일인지를. 용서하고 용서받는 일이 왜 인간의 편협성을 벗어나는 우주적인 사건인지를. 서울 시내의 호텔과 나무 위의 새둥지가 그리 크게 다른 것이 아님을. 협력이라는 것은 나를 줄이고 반대하는 쪽을 수용하는 일이란 것을. 부엌 흙바닥에 쭈그려 앉아 석양빛을 모로 받으며 어머니를 위해 아궁이 불을 살리던 일이 바로 성불(成佛)의 길이었음을.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건명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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